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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미 “데뷔 30주년… 상상도 못할 일을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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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수미 “데뷔 30주년… 상상도 못할 일을 이뤘다”

입력
2016.08.23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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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뷔 30주년을 맞은 소프라노 조수미. 유니버설뮤직 제공
데뷔 30주년을 맞은 소프라노 조수미. 유니버설뮤직 제공

“예전에는 오페라 본고장 이탈리아 사람들을 제외한 외국인들도 주역으로 데뷔하기 힘들었습니다. 더욱이 동양인이 그들의 오페라에 주역을 맡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죠.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한국을 대표하는 소프라노 조수미(54)는 꼭 30년전 데뷔 무대를 이렇게 회상했다. 조수미가 존타 국제 콩쿠르 우승을 시작으로 유럽 주요 국제대회를 석권한 것은 1986년을 전후. 그 해 이탈리아 트리에스테의 베르디 극장에서 베르디 오페라 ‘리골레토’에 질다 역으로 데뷔했다. 1986년 데뷔 당시 각종 매체가 조수미의 기사화하긴 했지만 그녀의 인지도는 그로부터 2년 뒤인 1988년 카라얀과의 오디션이 알려지면서 폭발적으로 올라갔다. 카라얀은 1989년 베르디의 ‘가면 무도회’를 녹음하며 조수미를 오스카 역에 캐스팅했다. 플라시도 도밍고가 주역을 맡은 이 음반은 카라얀 최후의 오페라 녹음이라는 또 다른 의미 있는 기록을 남겼다.

조수미가 무대 데뷔 30주년을 기념해 앨범 ‘라 프리마돈나’를 23일 유니버설뮤직에서 발매하고, 같은 제목의 기념공연을 연다. 25일 충주를 시작으로 내달 3일까지 서울, 군산, 창원, 안양 등을 돈다. 그는 음반사 유니버설 뮤직과의 인터뷰에서 “상상도 못했던 많은 성과들을 30년 동안 이룰 수 있어서 너무나 기뻤다. 정말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 다음은 일문일답

● 먼저 축하합니다! 국제 오페라 무대 데뷔 30주년을 맞이합니

다. 소감을 말씀해 주십시오.

1986년도에 ‘리골레토’로 데뷔해서 이제 데뷔 30주년입니다. 그동안 너무나 많은 일들을 했습니다. 상상도 못했던 많은 성과들을 30년 동안 이룰 수 있어서 너무나 기뻤습니다. 정말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시간이 빠르게 지나간 것 같습니다.

● 1986년 이탈리아 트리에스테 베르디 극장에서 ‘리골레토’ 중 질다 역으로 데뷔했습니다. 이날 공연이 어땠는지, 공연에 어떻게 임했는지 기억이 나시나요? 예전에는 오페라 본고장 이탈리아 사람들을 제외한 외국인들도 주역으로 데뷔하기 힘들었습니다. 더욱이 동양인이 그들의 오페라에 주역을 맡는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죠. 기적 같은 일 이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준비를 정말 많이 해서 전혀 떨리지 않았어요. 분장실에서 기다리며 물론 흥분되기도 했지만 빨리 무대에 올라가서 노래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어요. 그 순간이 너무나 자연스러웠어요. 꼭 일어나야만 했던 일 같았죠. 세상에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꽃다발과 화분을 받 았던 적이 없었어요. 분장실 전체가 꽃으로 완전히 뒤덮였었죠.

1986년 리골레토 질다 역으로 데뷔했을 당시 조수미 모습. PRM제공
1986년 리골레토 질다 역으로 데뷔했을 당시 조수미 모습. PRM제공

● 다섯 살 때부터 친 피아노에 빠져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본인 이 성악에 재능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습니까?

부모님은 월급쟁이셨고 1960년대 전세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셨습니다. 제가 첫 딸이었는데 워낙 특출했었나 봐요. 동네 할머니들이“ 아이가 너무 똑똑하고 영리하면 단명한다”면서“ 무엇이든 두드려야 나쁜 액운이 떠나간다”고 하셨대요. 아버지와 어머니는 겁이 나셨겠죠. 너무 어린 아이인데. 그래서 무엇을 두드려야 하나, 북을 두드려야 하나 생각하시다가‘ 피아노를 두드리면 되겠구나’ 하시고 제게 피아노를 시키셨죠.

얼마 뒤 제가 절대음감을 갖고 있다는 걸 어머니께서도 아셨다고 해요. 노래를 라디오에서 들으면 피아노로 치면서 바로 따라 불렀다고 하셨죠. 어머니는 전부터 오페라를 좋아하셨어요. 저를 가지셨을 때 소프라노 마리아 칼라스, 레나타 테발디 등의 노래를 거의 24시간 들으셨다죠. 딸이 태어나면 자신은 하고 싶었지만 이루지 못했던 성악가의 꿈을 꼭 이루게 하리라는 결심을 하셨대요. 저는 다른 선택이 없었죠. 태어나자마자 바로 성악가가 되어야 하는 운명이 주어진 겁니다.

어머니는 욕심이 많으셨어요. 어릴 적에 저는 안해본 게 없었어요. 김연아 선수처럼 피겨스테이팅도 했죠. 피아노·발레·가야금은 물론이고, 미술학원과 웅변학원도 다녔어요. 초등학교 2~3학년때쯤 웅변대회에 나갔어요. 마침 거기에 목소리를 연구하는 전문가가 왔는데, 제 목소리가 너무 독특하다고, 연구대상이라고 말씀해주셨죠. 웅변대회에서는 초·중·고·대학교 등 모든 참가자를 통틀어서 제가 대상을 받았어요.

● 어린 시절의 히어로나 히로인은 누구였나요.

어릴 적엔 음악인이나 예술인에게 큰 관심 없었어요. 그보다는 동물 보호하는 사람, 수의사, 선교사 등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 말 못하는 동물들을 도와주는 사람들이 존경스러웠죠.

그리고 저도 커서 수의사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었어요. 제가 워낙 동물, 특히 고양이, 개 등을 너무 좋아했거든요.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개도 집에 데려와 돌봐주곤 했죠. 그리고 정의에 대한 열정이 있었어요. 어디서 불의를 보면 못 참는 스타일이었죠. 정의를 위해 싸

우는 사람들을 존경했어요.

● 선화예고 유병무, 서울대음대 이경숙 선생님을 은사로 꼽았습니다. 두 분의 가르침 중 어떤 것이 기억나나요?

선화예고 때 유병무 선생님께서 지도하셨던 합창단 활동이 기억에 남아요. 솔로도 했었지만, 합창은 서로 다른 음색이나 음역이 만나서 하나의 하모니를 이루는 음악이잖아요. 솔로도 중요하지 만 함께 만들어내는 음악이 아름답고 중요하다는 걸 합창 활동을 하면서 배웠어요. 서울대에서는 이경숙 선생님께 독일 가곡, 오페라 등을 많이 배웠어요.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의 영향 때문인지 슈베르트·브람스·볼프 등 심오한 독일 가곡(리트)의 세계를 먼저 접했어요. 그래서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약간 철학적이고 심오한 음악에 많이 빠져들었죠.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유학은 이탈리아로 가게 되었어요. 외향적이고 표현성이 강한 나라로 가게 됐죠.

● 독일이 아닌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나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제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수석 입학했어요. 장학생으로 들어갔죠. 당시 실기하고 필기 합산한 제 점수가 서울대 음대 역사상 최고점이었다고 해요. 그랬는데 입힉 직후 연애를 했어요. 1년 동안 공부 거의 안 하고 강의 안 들어가고 그래서 전과목 F학점을 맞았어요. 제가 81학번인데 당시 저희 학번 때만 해도 1년 동안 공부를 못하면 제적되는 제도가 있었어요. 수석으로 들어가서 1년 후에 꼴찌인 52등으로 이른바‘ 잘렸죠.’ 교수님께서 재능 있는데 너무 안타깝다고 유학을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언해 주셨어요. 그래서 떠밀리듯 유학을 떠났죠.

데뷔 30주년을 맞은 소프라노 조수미. 유니버설뮤직 제공
데뷔 30주년을 맞은 소프라노 조수미. 유니버설뮤직 제공

● 서울대 성악과에서 보낸 2년 동안 기억나는 일은 무엇인가요?

공부를 거의 안 했죠. 음대식당에서 친구들하고 잡담하고 라면 먹고 놀러 다닌 생각이 납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때 놀아봐서인지 유학 와서 철저히 더 음악에 몰두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그 시절이 제일 그립고 값진 순간이 아닐까 합니다.

●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으로 유학을 갔죠. 그 시절은 어떻게 지냈나요?

후배인 체칠리아 바르톨리는 자기를 뒤에 태우고 오토바이를 탔던 조수미씨를 기억하고 있더군요. 두 분은 나중에 벨리니‘ 노르마’ 음반에 함께 출연하기도 했죠. 1983년 이탈리아에 처음 갔어요. 갓 스무 살이었잖아요. 가서 보니 베스파(VESPA)라고 이탈리아 사람들이 타고 다니는 작은 오토바이가 눈에 띄었어요. 한국말로 하면‘ 말벌’이란 뜻이죠. 저희 산타체칠리아 음악원이 스페인 광장 옆에 있어요. 하루는 그 오토바이를 빌려서 바르톨리를 뒤에 태우고 스페인 광장을 신나게 돌아다녔어요. 경쟁에서 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굉장히 열심히 공부했던 기억이 나요. 그래서 5년제 음악원인데 2년 만에 졸업했죠. 노래 연습뿐만 아니라 음악사·무대학·서양논리·종교학 등을 시험 봐야 하는데 언어가 부족하니 어학원에 다니면서 열심히 했어요.

빨리 졸업하고 싶었어요. 어서 한국으로 돌아가 남자친구도 만나리란 생각이 동기부여가 됐죠. 그런데 이탈리아로 온 지 3개월 만에 남자친구로부터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았어요. 그래서 5년 동안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어요. 2년 만에 음악원을 끝내고 바로 국제 콩쿠르 준비를 했어요. 어머니와 아버님이 넉넉한 형편이 아니다보니 돈 보내시지 말라고 했어요. 1983년 당시에는 인터넷도 없었고 국제전화 한 번 하려면 3시간을 버스 타고 가야 했죠. 편지로 소통했어요. 돈도 필요했기에 콩쿠르를 준비했어요. 1등을 하면 상금을 받으니까요. 다행히 입상을 했죠. 지금이야 이렇게 웃으면서 이야기하지만 고생 을 많이 했어요. 모든 것이 다른 환경에서 젊은 여학생이 부모님과 거의 연락도 되지 않는 곳에서 생활했잖아요. 저에 대한 부모님의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봅니다. 한국에서 2년 간 거의 공부를 하지 않았던 저도 이탈리아에서는 재능을 펼쳐야 했으니 공부를 해야만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 체칠리아 바르톨리와 함께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을 만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오디션 영상은 아직도 유명합니다. 카라얀을 처음 만났을 때의 느낌은 어땠습니까? 그의 조언은 무엇 이었습니까?

당시 카라얀은 세계 음악계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죠. 저는 운명론자예요. 중·고교 때부터 지냈던 작은 아파트에 책상 하나, 침대 하나 들어가는 작은 제 방이 있었어요. 책상 위에는 카라얀이 베를린 필을 지휘하는 브로마이드가 걸려있었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보는 사람이 카라얀 이었고, 잠 들기 전 마지막으로 보는 사람도 카라얀이었습니다. 그래서 카라얀이 오디션에 와달라고 연락했을 때 놀랐고, 오디션을 보고 카라얀을 만났을 때도 떨리긴 했지만, 굉장히 친근하게 다가왔어요. 마치 가족 중에 한 사람을 본 것 같은 느낌이었죠.

아침저녁으로 매일 뵈었던 분이니까요. 머리카락도 만져보고 파 란 눈동자도 가까이 봤죠. 저를 굉장히 예뻐하셨어요. 다들 두려워하는데 저는 그렇지 않았으니까요. 여러 가지 개인적인 이야기도 많이 했지만 지금까지 가장 마음속에 남아 있는 그의 충고는 두 가지였어요.

첫째는 밤의 여왕 역할을 많이 하지 말아라. 목소리 범위가 너무 높고 목을 혹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저는 많이 했어요) 두 번째는 제가 여쭤봤거든요. “마에스트로, 하루 24시간 동안 잠자는 시간 빼고는 제가 공부하는 멜로디가 머릿속에 계속 맴돌고 다른 일은 전혀 못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그러자 카라얀은 이렇게 말했어요.

“바이올린 줄도 팽팽하면 끊어진다. 음악이라는 팽팽한 줄을 놓아서 쉬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고 하셨죠. 자신도 평생 머릿 속에 음악이 들어 있어서 힘들었는데 그 테크닉을 깨달은 지 얼마 안됐다고 하시면서요. 그것을 저도 깨달아야 한다고 말씀하

셨죠.

저도 아직 노력하고 있는데 저는 아무래도 반려견이 음악이라는 팽팽한 줄에 휴식을 주는 것 같습니다. 반려견·요리·축구 등 같은 취미가 많이 도움이 됐어요.

● 크리스티나 도이테콤과 더불어 모차르트‘ 마술피리’ 중 밤의 여왕을 가장 잘 부르는 소프라노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아르놀트 외스트만, 게오르그 숄티, 아르맹 조르당이 지휘한‘ 마술피리’에서 밤의 여왕을 맡았죠. 가장 노래하기 힘든 역할로도 손꼽히는‘ 밤의 여왕’은 조수미에게 어떤 존재였나요?

밤의 여왕은 비인간적이라고 해야 하나, 부자연스러워요(unnature). 완벽해야 하니까요. 두 번째 아리아는 컨디션이 상 당히 좋아야만 소리가 나오더군요. 아무리 연습을 많이 해도 무 대에서 컨디션이 안 좋으면 힘든 배역이죠. 밤의 여왕을 할 때는 잠도 잘 못 잤고,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어요. 밤의 여왕이 요구하는 무대 메이크업도 늘 부담이 됐어요. 화려한 왕관과 의상에다 가끔씩 날아다닐 수 있게 와이어 장치를 달기도 하죠. 로스앤젤레스에서는 공중그네를 타고 날아다니면서 불렀습니다. 그 어려운 노래를 불러야하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연출자들이 더 스펙터클한 것을 원했어요. 위험하기도 했어요. 생명보험에 서명하면서 출연했었죠. 그래도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었어요. 제가 남들이 다 하는 것은 또 하기 싫어합니다.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까지 가면서 도전하며 연기했습니다.

●‘마술피리’ 중‘ 밤의 여왕’을 비롯해서“ 이것이 조수미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알려주십시오. 질다·루치아·올랭피아·비올레타 등등 많을 것 같습니다. 드라마틱한 부분과 코믹한 부분이 잘 섞여있는 성격이기 때문에 오페라에서 부를 배역이 꽤 많아요. 질다·루치아·비올레타와 같은 비운의 여성들, 결국에는 죽음을 선택하는 역도 어울리지만 ‘호프만 이야기’ 중 올랭피아라든지,‘ 사랑의 묘약’에서의 아디나,‘ 연대의 딸’에서 나오는 코믹한 주인공 마리도 잘 맞아요.

● 함께 작업했던 지휘자들과의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주빈 메타, 로린 마젤, 카라얀, 게오르그 숄티, 제임스 레바인 등 세계적인 지휘자들과 많은 작업을 함께했죠. 지휘자들마다 배울 점이 많았어요. 숄티 경은 항상 너무 가까이서 말씀하시거든요. 그래서 침이 정 말 많이 튀어요. 그래서 리허설 때 무엇인가 이야기하러 가까이 오시면 저는 도망가듯 했죠. 로린 마젤의 경우 평소엔 아저씨 같은 이미지인데 무대에 올라가면 제왕으로 변해요. 한번은 길거리에서 신문지를 돌돌 말고 청바지를 입은 사람이 눈에 밟혀서‘ 저 사람 어디서 봤지?’ 생각하 는데 저한테 인사를 하더군요. 그래서 저도 눈인사를 했는데 누군지는 몰랐어요. 한 참 지나가고 생각해보니 로린 마젤이었어요. 당시 매일 보는 사람이었는데 말이죠. 주빈 메타는 항상 저한테 인도 음식 먹으러 가자고 그랬어요. 칠 리 고추 등 제가 제일 안 좋아하는 음식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먹은 뒤에는, 메타를 피해 매일 도망 다녔죠.

● 함께 듀엣을 노래했던 성악가들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가수는 누구인가요?

플라시도 도밍고 아닐까 합니다. 제가 제일 인정하는 예술인이며 음악인이에요. 여러 장르나 음악에 대해 열려 있는 모습, 고음이 약하다 보니깐 늘 힘들어하지만 항상 자신의 음역을 찾아서 열심히 해내는 걸 볼 때 놀라웠어요. 또 인간관계도 좋아서 명사이신데도 항상 청소부, 레스토랑에서 서빙하시는 분들, 힘든 노동을 하시는 근로자분들에게 늘 친근하고 잘 대해주세요. 그 모습을 볼 때면 인간적이고 존경스럽더군요. 안드레아 보첼리 역시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늘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정식 음악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매일 공부하고 노력하는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 공연할 때마다 늘‘ 모든 것을 주는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무대에 서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준비 과정이 필요합니다. 연습시간이 많은 것은 물론이고요. 개인적으로 공연을 준비하다 보면 생각할 것이 백 가지 넘게 많거든요. 저는 연출도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챙깁니다. 작은 것 하나라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 어요. 성악가들이 공연할 때 몸을 사리는 경우가 꽤 있죠. 공연할 때도 100% 다 안 하고 앙코르도 딱 한 곡만 하고 들어가기도 합 니다. 저는 그렇게 안 해요. 공연 때마다 최선을 다해서 관객들과 교감을 나눕니다. 관객들은 제게 사랑을 줍니다. 모든 것을 주고 나면 제 자신이 비워지죠. 그것을 빨리 채워서 다음 공연에서 좀 더 나은 성숙한 모습을 보여드리려 합니다. 무대에 서는 사람들, 퍼포머(Performer)는 자신의 일을 서비스 업이라고 생각해야 해요. 나의 모든 것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 요. 음식 같은 걸 서빙 한다는 뜻이 아니죠. 예술가는 청중을 위해 서 존재합니다. 많이 주면 줄수록 돌아오는 사랑은 더 커집니다.

데뷔 30주년을 맞은 소프라노 조수미. 유니버설뮤직 제공
데뷔 30주년을 맞은 소프라노 조수미. 유니버설뮤직 제공

● 크로스오버, 영화음악 등등 클래식 장르가 아니더라도 뛰어 난 해석으로 노래했습니다. 조수미씨의 노래가 클래식 음악을 조금 더 가까이 느끼는 데 기여했다고 보는데요. 곡을 선택하는 나 름의 기준이 있습니까?

크로스오버 하면 2000년에 나왔던‘ 온리 러브(Only Love)’가 백만 장 넘게 팔렸죠. 앨범이 나오기 전까지 준비 기간도 길었고, 음반에 같이 참여하는 분들과 신중하게 음악을 선택했어요. 저는 크로스오버나 영화음악·뮤지컬·가요 등의 전문가가 아니기 때 문에 그쪽 전문가 분들이 곡을 선택해주시면 곡을 다 들어봅니다. 목소리에 맞는지 연습해보고 수많은 곡 중에서 고르는 거죠. 쉬운 작업이 아니에요. 그리고 제가 좋아하는 곡보다는 음반에 들어갔을 때 사람들이 좋아하고 음반의 전체적인 콘셉트에 맞는 것으로 선택해요.

● 저명한 성악 콩쿠르인 2017년 BBC 카디프 싱어즈 오브 더 월드에 심사위원으로 참가합니다. 요즘 젊은 세대 성악가들을 보 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조수미 같은 성악가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으십니까?

예술이 대개 그렇지만 음악은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은 장르에요. 누구도 연습을 대신 해주지 않죠. 혼자 악보를 보고, 외우고, 연습해야 하는데 요즘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혼자 공부 하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나가기 보다는 유튜브나 관련 자료들을 많이 참조하는 것 같아서요. 그런 면이 안타까워요. 자신이 먼저 악보를 보고 자신의 음악을 어느 정도 만들고 난 뒤에 레퍼런스용 영상은 참고로만 보면 좋지 않을까 합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요즘 후배들은 조금 성급한 것 같아요. 빨리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하는데 어떤 장르도 마찬가지지만 성악도 빠른 지름길은 없어요. 천천히 짚어가며 자신의 길을 가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콩쿠르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요? 콩쿠르에 참가하 는 젊은 성악가들의 마음가짐은 어떤 편이 좋을까요?

제가 콩쿠르가 나갔을 때와 요즘 젊은 친구들이 콩쿠르 나가는 이 유는 다소 차이가 있을 거라고 생각요. 저는 생존의 문제였어요. 먹고살기 위해서 도전했죠. 요즘 젊은 친구들은 그런 경우는 많지 않으리라 생각해요. 콩쿠르에 참가하는 마음가짐은 역시 우승을 바라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우승보다는 참여하는 데 의의가 있다’도 틀린 말은 아니지만, 최선을 다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려고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 옳아요. 하지만 누구나 1등을 할 수는 없죠. 수상을 못 하면 콩쿠르 기간에 다른 친구들이 하는 노래를 듣거나 심사위원을 찾아가서 좋은 충고를 듣는 게 도움이 되더군요. 떨어지더라도 실력 없다고 자책하기보다는 배우고 가는 것이 있어야 해요. 다음에 또 나갈 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언젠가 인터뷰에서 젊은 사람들은 고리타분한 것보다 인스턴트한 음악을 찾는다고 했습니다. 성악가도 프로페셔널하게 변해 뚱뚱한 성악가가 없다고 하셨죠. 리허설 시간도 정확히 지키고 앨범 녹음했으니까 끝이 아니라 홍보와 마케팅에 대해서도 함께 고민하는 시대라고요.21세기에 활동하는 성악가들은 어떤 마음 가짐으로 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세상은 정말 많이 변했어요. 예술가라도 인터넷이나 그에 기반한 활동 없이 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1950~60년대 디바나 프 리마 돈나의 신비주의는 거의 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이제는 프로페셔널리즘(professionalism)으로 가야 합니다. 리 허설 시간을 정확히 지키고 자신에게 맡은 역할에 충실하고 홍보와 마케팅도 함께 고민해야 하죠. 음악가의 역할을 뛰어넘어서 사회나 세계에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베풀 수 있는, 그런 활동까지 생각해볼 수 있는 세상이 왔다고 생각해요. 개인적인 성공도 중요하지만, 음악이 가진 힘을 희망 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많은 사회 활동에 사용될 수 있도록 젊은 음악인들이 생각해야 합니다. 옛날처럼 공부한다고 연습한다고 음악이라는 섬에 갇혀서만 살기에는 음악인들의 역할이 중

요해졌고 할 일들이 많아졌습니다. 그 섬에서 나와야 해요.

● 반려동물을 사랑하는 동물애호가로 정평이 났습니다. 지금은 어떤 동물들과 살고 있나요? 반려동물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십니까?

저는 지금 16살 노견 한 마리와 3개월짜리 우량한 강아지 두 마 리 이렇게 세 마리랑 같이 지냅니다. 반려견들은 제게 가족보다 더한 아이들입니다. 바쁘고 집에 거의 없는 상황이지만 저를 도와주시는 분들에게 맡겨가면서 동물들과 함께합니다. 그들이 가진 교감의 힘은 엄청납니다. 제가 힘들거나 아플 때 위로 받아요. 반려동물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 자기 관리가 모범이 되는 성악가로 꼽힙니다. 건강 관리를 위

해서 어떤 일을 하십니까?

건강관리를 잘한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워낙 바쁘거든 요. 어떤 사람들은 바쁠수록 운동을 하라고 이야기하죠. 말이 쉽지 바쁘니 못하게 되더군요. 운동할 시간에 악보 한 번 더 보게 되고, 운동 갈 시간에 반려견이랑 산책 한 번 더 하게 되고 씻겨주고 먹여주게 됩니다. 건강관리를 위해 따로 하는 것은 없어요. 하지만 스트레스를 많이 안 받으려고 노력해요. 심플하게 살려고 하죠. 내 할 일에 경각심을 갖고 열심히 하고, 잘 먹고 잘 자고 남들이 다들 하는 술·담배 안 하고, 튀긴 것, 아이스크림 안 먹으려고 해요. 작은 것부터 주의하죠.

● 음식과 관련된 금기가 있나요? 공연 전에 피하는 음식? 목에, 몸에 좋다고 평소 즐기는 음식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성악가는 몸 전체를 통해 공명하는 악기거든요. 목에 안 좋은 건 되도록 안 먹으려고 합니다. 술·담배는 당연히 안 하고요. 튀긴 것, 짜고 매운 것은 안 먹으려 해요. 저는 고기를 안 먹는 채식주의자예요. 공연 전에 저같이 풀만 먹고 노래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사람들이 많이 놀라죠. 저는 파스타·빵·바나나·샐러드를 많이 먹어요. 고기를 안 먹으니 스태미너가 떨어지기보다 오히려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고 훨씬 더 좋더군요. 찔러서 피 나오는 건 생선만 먹습니다.

● 클래식 음악의 한류를 이야기 할 때 성악 분야가 먼저 손꼽힙니다. 콩쿠르나 세계 무대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왜 노래를 잘 하고 재능이 뛰어나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예술적인 방면에 재능을 갖고 있죠. 성악 분야는 특히 뛰어난 것 같아요. 이탈리아 사람들도 노래 잘하죠. 우리나라와 이탈리아는 비슷한 점이 많은 나라예요. 두 나라 모두 삼면이 바다인 반도 국가이고, 기후도 비슷하죠. 극적인 면도 있고 정도 많아서 노래로 표현을 잘 하는 것 같아요. 손재주도 뛰어나고요.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로 우리나라가 노래를 잘하는 지는 잘 모르겠어요. 아마도 그렇게 태어난 민족인 것 같아요. DNA 속에 그렇게 재능을 가진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은 거죠.

● 세계 데뷔 30년 이후, 앞으로의 활동은 어떻게 가져갈 생각이십니까?

콘서트나 투어가 많아서 계속 바쁠 것 같아요. 그리고 요즘 제가 공연 외에도 국제 콩쿠르 심사위원이나 마스터클래스 제안을 많이 받아요. 시간이 날 때마다 참여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사회적인 활동도 이어가려 합니다. 3년 전부터 시작했던 장애인 어린이를 위한 후원, 반려동물을 위한 일, 유네스코 평화예술인 활동도 계속 할 겁니다. 당장 9월 1일 이천에서 유네스코 자선음악회를 엽니 다. 수익금을 모아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위해서 사용할 겁니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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