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라도 실수할까 두려워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어요.”
엘살바도르에서 갱단의 폭력을 피해 간신히 미국으로 도망쳐 온 A(15)군은 또 한번 공포스러운 순간과 마주했다. 이번에는 길거리가 아닌 미 연방 이민법원에서였다. 그는 변호사도 없이 영어-스페인어 통역 기기 하나만 착용한 채 피고석에 앉아야 했다. 잔뜩 겁에 질린 소년은 판사의 물음에 고갯짓으로 ‘예’ ‘아니오’만 겨우 답할 수 있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20일(현지시간) “보호자 없이 미국으로 망명한 중미 아이들이 추방의 갈림길에서 스스로 변호해야 하는 처지에 놓여있다”면서 “시대착오적인 사법시스템이 이들의 권리를 침해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변호사 선임 여부는 판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2004년 10월부터 올해 6월까지 법무부 통계자료에 따르면 홀로 재판을 치른 아이들 중 절반 이상이 국외로 강제 추방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적인 변호를 받은 아이들 가운데 이 비율은 10% 수준에 그쳤다.
미국에서도 변호사선임권은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이다. 따라서 사설변호사를 선임할 능력이 없는 피고인에게는 반드시 국선변호사를 배정해야 한다. 하지만 이민법 위반으로 추방재판에 기소된 외국인에게는 이 같은 의무가 적용되지 않는다. 실제 미국시민자유연합(ACLU)이 ‘이민자 인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전수 조사한 결과, 피고인에게 국선변호인을 지정해주지 않는 경우는 민ㆍ형사를 막론하고 이민법원이 유일했다.
연방정부 차원의 지원제도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추방 위기에 처한 어린이들에게 무료 변론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익 로펌도 있다. 하지만 한 해 3만7,714명에 달하는 중미 어린이 망명 규모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한 게 현실이다.
미국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에릭 홀더 전 법무장관은 “어린 망명자들에게 헌법상 변호사선임권이 보장되지 않더라도 우리에게는 그들에게 변호사를 배정할 정책적 이유와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법무부 산하 이민심사행정국(EOIR) 대변인 역시 “변호사선임권을 보장함으로써 이민절차의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다”고 재차 강조했다.
강유빈 인턴기자(연세대 불문학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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