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년 전 이미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여우주연상(‘소피의 선택’)을 수상했다. 그보다 3년 전에는 아카데미 여우조연상(‘크레이머 대 크레이머’)을 받았다. 아카데미 연기상 단골 후보(19번)였다가 2012년에 또 여우주연상(‘철의 여인’)을 거머쥐었다. 오스카 트로피만 세 차례 안았는데도 상복이 없다는 평가를 듣는다. ‘우리 시대 최고의 배우’라는 칭호가 붙기도 하고 ‘연기의 신’이라는 수식이 따라 다니는 배우답다. 아무리 연기의 달인이라도 한 번쯤은 관객을 실망시킬 수 있을 텐데 메릴 스트립은 매번 감탄을 불러낸다. 24일 개봉하는 ‘플로렌스’도 스트립의 진가가 다시 빛을 발하는 영화다. 영화가 품은 기묘한 사연과 슬프고도 웃기는 실화는 스트립의 몸을 통해 온전히 빛난다.
플로렌스(메릴 스트립)는 부모에게 막대한 유산을 물려 받은 음악 애호가다. 자신이 직접 무대에 올라 객석의 환호를 만끽한다. 빼어난 연기력이나 세련된 무대 매너를 지니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관객들은 그에게 열광한다.
비밀은 곧 밝혀진다. 여러 음악인들을 후원하는 플로렌스의 재력이 환호를 불러낸다. 하지만 플로렌스는 사람들의 거짓 환대를 눈치채지 못한다. 자신이 음악적 재능을 타고 났다고 생각하고 있고, 최악의 음치인데도 노래 실력이 뛰어나다는 착각 속에 산다. 남편이자 매니저인 베이필드(휴 그랜트)가 플로렌스의 삶을 판타지로 위장한다. 악평을 퍼부을 사람들은 아예 공연장 출입을 봉쇄하거나 돈으로 환호를 산다. 플로렌스는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 속 왕의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자신감이 충만한 플로렌스는 성악 레슨을 재개하더니 무대에 올라 노래하겠다고 선언한다. 플로렌스를 안온하게 감싸던 착각의 성이 무너질까 봐 베이필드는 안달할 수밖에 없다. 연인 캐슬린(레베카 퍼거슨)과 데이트를 즐기면서도 아내 플로렌스의 판타지를 지키려 애를 쓴다. 베이필드의 '보호'로 음반을 낸 플로렌스는 카네기홀 공연까지 준비한다. 천하의 음치는 막강한 재력으로 세계 최고 무대에 기어이 서게 되나 과연 관객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영화가 관객들의 호기심을 가장 많이 자아내는 대목이다.
플로렌스의 엉망진창 노래가 매번 폭소를 유발한다. 소프라노들이 실력을 뽐내듯 불러 젖히곤 하는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 속 아리아 ‘밤의 여왕’을 그가 쇳소리로 소화할 때 배꼽을 쥐게 된다. 뮤지컬영화 ‘맘마미아’(2008) 등에서 숨은 노래 실력을 발휘했던 스트립은 타고난 음치처럼 노래를 하는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지 않을 수 없다. 플로렌스의 공연을 신랄하게 비판한 신문들을 사서 폐기하는 베이필드의 노고, 돈 때문에 플로렌스에게 아부하다가 공연 초대를 여러 이유로 사양하는 음악 대가들의 속물적인 모습 등은 쓴웃음을 준다.
플로렌스의 막무가내 도전은 웃음뿐 아니라 꽤 묵직한 메시지도 안긴다. 비웃음의 대상이 될 지라도 꿈에 도전하라고. 자신만의 꿈을 완성하는 것은 영감이나 노력이 아닌, 자신감일지도 모른다고. ‘필로미나의 기적’(2013)과 ‘더 퀸’(2006),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2000) 등을 연출한 영국의 명장 스티븐 프리어스 감독의 신작이다. 15세 관람가.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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