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영호(55) 주영국 북한대사관 공사 가족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망명길 뒷 이야기가 속속 전해지고 있다. 태 공사의 원활한 한국행을 돕기 위해 미국과 영국, 독일 등 주요 서방 국가 정보기관 요원들이 첩보전과 다름없는 정보공유 및 물량투입을 이뤄낸 사실이 외신들을 통해 낱낱이 드러난 것이다. 영국 언론 선데이 익스프레스는 21일 태 공사 가족이 삼엄한 경계 아래 영국 공군기를 타고 독일을 거쳐 끝내 한국행을 이뤄낸 과정을 보도하면서 ‘제3의 사나이’를 쓴 작가 그레이엄 그린의 첩보소설에 버금가는 이야기라고 소개했다.
보도에 따르면 태 공사는 약 두 달 전 런던 북서부 왓퍼드의 한 골프장에서 복수의 영국 정보기관 요원을 만났다. 망명을 앞두고 치밀하게 설계된 만남이었는지, 우연히 이뤄진 사적 모임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태 공사는 이 자리에서 북한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한 불안감을 드러냈다. 신문은 태 공사가 한국행 비행기를 타면서도 골프채를 챙길 정도의 골프광이었다는 점을 언급하면서 필드에서 만난 영국 정보요원들에게 별다른 경계심 없이 속내를 털어놨을 것이라고 내심 분석했다. 더불어 신문은 “태 공사가 부인 오혜선 역시 북한행을 우려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망명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고, 이 와중에 영국 정보요원들을 만나게 됐다”고 전했다.
태 공사의 심상치 않은 심경을 육성으로 확인한 영국 정보기관은 2주 뒤 외무부를 통해 미국 정보당국에 이 같은 사실을 알렸다. 북한 최고위급 외교관의 망명 가능성에 화들짝 놀란 워싱턴은 곧바로 소수의 고위 관계자들을 런던으로 급파해 영국 정부와 태 공사의 한국행 작전수립에 착수했다. 다만 극도의 보안을 유지했음에도 미ㆍ영 양국의 정보공유 과정에 빈틈이 생겼는지 ‘유럽 모처에서 망명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서울에 돌면서 태 공사는 어쩔 수 없이 망명지로 한국을 선택했다고 익스프레스지는 해석했다.
태 공사에 대한 망명작전 설계가 완료된 7월의 어느 평일 이른 아침 태 공사 가족은 마침내 망명길에 오를 수 있었다. 태 공사 가족은 영국과 미국의 외교 당국, 정보기관 관계자 등 7명과 함께 옥스퍼드셔 브라이즈 노턴 공군 기지에서 영국 공군 BAe146기(정원 30명)에 올랐다. 이에 앞서 태 공사의 부인 오씨는 영국의 10년 생활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내듯 공항으로 가는 길에 갑자기 대형 마트 ‘마크스 앤드 스펜서’에 들려줄 것을 동행한 요원들에 요청했다고 정보기관 관계자가 전했다. 이렇게 오씨의 영국에서의 마지막 ‘장 바구니’는 애장했던 테니스 라켓과 함께 한국행 기내 화물로 실릴 수 있었다.
영국을 이륙한 태 공사 일행은 영국 공군의 타이푼 전투기 2대의 호위를 받으며 당일 오전 독일 람슈타인의 미 공군 기지에 착륙했다. 2시간의 짧은 비행시간 동안 태 공사의 둘째 아들 금혁은 친구들에게 갑자기 사라지게 된 사연을 편지로 남겼다. 태 공사는 아들 곁에서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에게 감사 편지를 쓰고 서명을 한 후 “반드시 총리에게 직접 전해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익스프레스는 보도했다.
양홍주기자 yangh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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