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기억] ‘빨간 피터의 고백’ 첫 공연
한여름 30도가 넘는 무더위 속, 채 30평이 안 되는 창고극장 지하무대에 프록코트를 차려 입은 괴상한 모습의 원숭이 한 마리가 나타난다. 이후 한 시간 동안 철창에 갇혔음에도 무대를 장악한 빨간 원숭이는 사다리와 그네를 오르내리며 익살스런 표정으로 세상을 조롱한다. 아프리카 밀림에서 잡혀와 인간의 삶을 택해 서커스 스타로 변한 빨간 원숭이 피터는 현대인의 진정한 자유와 정체성에 대해 질문을 던졌고 관객들은 이에 매료됐다.
1977년 8월 20일, 1인 모노드라마 ‘빨간 피터의 고백’이 서울 명동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첫 막을 올렸다. 연극배우 추송웅이 기획 제작 장치 연출 연기 등 1인 5역을 맡아 독특한 몸짓과 화술로 청중을 사로잡은 이 공연은 연일 매진 사례를 기록하며 한국 연극계의 신화로 남았다.
독일 작가 프란츠 카프카의 산문집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각색한 추송웅은 초연에 앞서 매일 창경원을 찾아가 원숭이의 행태를 연구했다. 그의 말처럼 ‘원숭이를 몸에 넣는 동화 작업’을 거친 공연은 8년을 이어가며 482회나 무대에 올려졌고 무려 15만 여명의 관객들이 창고극장에서 호흡을 함께 했다.
1985년 겨울, 일본 공연을 앞둔 추송웅은 급성 패혈증으로 쓰러진 후 다시 눈을 뜨지 못했고 빨간 피터가 태어났던 삼일로 창고극장은 2015년 경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추송웅의 아들딸 상록과 상미는 아버지의 삶을 따라 둘 다 영화감독 겸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손용석 멀티미디어부장 st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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