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비(28ㆍKB금융그룹)는 경기중에는 좀처럼 표정 변화가 없다. 아웃오브바운즈(OB)를 내도, 승부를 결정 짓는 버디를 잡아도 그는 항상 무덤덤한 표정이다. 돌부처처럼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으로 경쟁자의 숨통을 끊어놓는 듯한 그의 플레이에 해외 언론은 ‘침묵의 암살자(Silent Assassin)’라는 무시무시한 별명을 붙여줬다.
116년 만에 올림픽 무대로 돌아온 여자 골프에서 박인비의 ‘명품 멘탈’이 빛나고 있다. 별명인 ‘침묵의 암살자’처럼 소리 없이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있다.
박인비는 19일(이하 한국시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 골프코스(파71ㆍ6,245야드)에서 열린 올림픽 여자 골프 이틀째 2라운드 경기에서 버디 6개와 보기 1개로 5언더파 66타를 쳤다. 이틀 연속 5타씩 줄인 박인비는 중간합계 10언더파 132타, 단독 1위로 대회 반환점을 돌았다. 스테이시 루이스(31ㆍ미국)가 9언더파 133타로 1타 차 2위에서 추격하고 있다.
박인비는 사실 이번 올림픽 출전 자체가 불투명했다. 손가락 부상으로 올 시즌 내내 고생했다. 통증 때문에 기권한 대회가 많았고, 컷 탈락도 적지 않았다. 올림픽 출전을 스스로 포기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올 정도였다. 지난달 박인비가 올림픽 출전 의사를 밝혔을 때도 주위에서는 “최근 하향세인데 후배들에게 양보 하는게 낫지 않겠느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박인비는 올림픽을 10여 일을 앞두고 실전 감각 점검을 위해 참가한 제주 삼다수 마스터스에서도 컷 탈락했다. 당시 모습은 전혀 박인비 답지 않았다. 정확한 아이언 샷으로 공을 핀 가까이 붙여 버디 기회를 잡거나 전매특허인 날카로운 퍼트 감각으로 타수를 줄여가는 박인비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박인비는 전혀 초조해 하지 않았고,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체크하는 것만으로도 얻은 게 있다는 듯 여유를 보여줬다.
그리고 17일부터 시작한 리우 올림픽 여자 골프에서 박인비가 보여준 성적은 놀라웠다. 한때 올림픽 출전을 포기할까 고민했던 선수라고는 믿을 수 없는 성적이다.
리우 올림픽 여자 골프는 앞서 열린 남자 골프와 달리 상위 랭커들이 대부분 참가해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돼 있다. 그래서 선수들은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지만 박인비 만은 전혀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플레이를 이어가고 있다.
부상으로 인해 두 달 넘게 고전했던 선수가 부담과 긴장이 큰 올림픽 무대에서 단숨에 이전 기량을 되찾을 수 있는 것은 실력을 떠나 경이로운 수준의 멘탈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박인비가 이번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낸다면 골프 역사상 최초의 ‘커리어 골든슬램’(메이저 4개 대회 우승과 올림픽 금메달)을 달성하게 된다. 박인비는 리우 올림픽 여자 골프 참가 선수 가운데 유일한 명예의 전당 헌액자이고, 메이저 대회 우승 트로피가 7개나 된다.
박인비는 “나는 지금까지 가시밭길을 걸어왔다.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던 지난해 브리티시 여자오픈 때도 허리 부상으로 통증이 심했다. 더 이상 손가락 부상에 대한 질문은 그만해 달라”며 단호한 모습을 보였다. 이어 “내 골프 인생의 하이라이트가 될 수 있도록 남은 두 라운드에서도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김기중 기자 k2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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