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8월 19일
1989년 유럽, 특히 동유럽은 냉전의 장벽과 이념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극적인 시공간이었을 것이다. 그 거대한 변혁의 무대가 펼쳐지기까지 각국 각료들과 외교관들은 물론이고 정치ㆍ이념과 무관하다고 해도 좋을 가족과 개인 등 다양한 주체들이 역사의 스포트라이트 바깥에서 또 저마다 긴박한 서사를 써나갔을 것이다. 그 해 8월 19일 오스트리아와의 국경도시인 헝가리 쇼프론의 첫 평화 집회에 모인 동유럽의 시민들도, 경험과 희망 사이에서 바장였을 것이다.
그 해 5월 헝가리가 ‘철의 커튼’으로 불리던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열었다.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로 촉발된 민주화 운동의 결과였지만, 국경 유지비용을 지탱하기 힘들만큼 재정이 어렵기도 했다. 석 달 뒤 집권 헝가리사회주의노동자당이 무너졌고, 10월 다당제와 대통령제를 보장한 헝가리공화국 헌법이 제정됐다.
헝가리 국경이 열렸다는 소식은 전 동유럽, 특히 가장 완고한 사회주의 국가였던 호네커의 동독 주민들을 고무시켰다. 사회주의 국가로의 여행은 상대적으로 자유롭던 동독 시민들은 헝가리의 열린 국경을 통해 오스트리아로 서독으로 망명할 수도 있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당연한 얘기지만, 헝가리 시민에 한한 조치였다. 헝가리 노동당은 동유럽의 국가들 특히 소련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오갈 데가 없어진 수만 명의 동유럽 시민들은 쇼프론 시 국경 검문소 인근에서 전기도 수도도 없는 길바닥과 숲에서 한뎃잠을 자며 때를 기다렸고, 집회를 열어 국경 개방을 촉구했다. 그들의 집회는 다급한 국제정치의 뜨거운 감자로 외신에 소개했다. 호네커는 동독인들의 강제송환을 요구했다. 외신은 그들의 집회를 ‘범유럽 피크닉’이라 불렀다. ‘피크닉’이 길어지면서 아침저녁 날씨도 쌀쌀해져 갔다. 그들은 대부분 반팔의 여름 옷 차림이었다.
노동당의 권력을 승계한 민주 개혁파 과두정부는 9월 11일 외국인에게도 오스트리아 국경을 ‘살짝’ 개방했다. 엄밀히 말하면 과도기 혼란을 핑계 삼아 경비병들에게 시민들의 월경을 묵인하도록 함으로써 소련의 반응을 살피려던 거였다. 베를린 장벽 붕괴(11월 9일)와 냉전 종식의 본무대가 시작됐음을 알리는 작은 신호탄이었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