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오래되고 치명적인 착각이다. 언어는 인간을 숙주로, 이 세상을 헤집고 다니며 자기의 삶을 산다.
오은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유에서 유’(문학과지성사)가 출간됐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 이후 3년만이다. 언어가 인간의 종속물이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소수의 부류 중에서도 오은은 그 사실을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몇 안 되는 시인이다. 그의 시 세계를 관통하는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언어유희’는 이번 시집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유희는 유희로 끝나지 않고 우연한 동음도 우연으로 끝나지 않는다.
“내 이름은 척Chuck이야/어느 날, 나는 나 자신에게 나를 소개했다//내가 나를 알은 척 하듯//내가 나를 모르는 나를/실은 알지만 애써 모르는 척했었던 나를/내 이름은 척이니까/잠시 척이 아닌 척했었던 거지/아니 잠시만 척인 척했었던 거지” (‘척’ 일부)
내가 나를 모른다는 고백, 혹은 모르고자 하는 고집이 허용되지 않는 세계에서 시인은 스스로를 ‘척Chuck’으로 명명한다. 어떻게 해도 풀리지 않을 것 같던 문제가 소리와 의미가 탈각되는 순간 허무하리만큼 간단히 해결된다. 어쩌면 이 세계의 모든 슬픔은 인간이 언어의 의미와 소리를 움직일 수 없게 묶어 버려 생긴 일일 지도 모른다.
“너무에 대해, 너무가 갖는 너무함에 대해, 너무가 한쪽 팔을 벌려 나무가 되는 순간에 대해, 너무가 비로소 생장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는 순간에 대해, 너무가 세상을 향해 팔 뻗는 순간에 대해, 너무가 품은 부정적 의미는 사라져” (‘너무’ 일부)
소리와 의미의 결합이 헐거워지며 생기는 언어의 빈틈, 자고 나면 사라질 그 허망한 빈틈을 시인은 절박하게 붙든다. 소리와 의미가 결합되기 전, 아직 무엇도 잔인하지 않았던 그때로 가자고 한다. 아니면 소리와 의미가 헤어진 뒤, 모든 잔인함이 종료된 이때로 가자고 한다. 그 불가능함을 가능하게 하는 것 또한 ‘너무’ 쉬운 일이다.
“불가능에 물을 끼얹어. 가능해질 거야. 쓸 수 있을 거야. 가능에 불을 질러. 불가능해질 거야. 대단해질 거야. 아무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거야.” (‘아찔’ 일부)
슈퍼맨 망토를 두르고 지붕 위에 선 아이의 운명처럼 시인의 운명도 그리 밝진 않다. 어른들의 잔소리가 쏟아질 것이다. 저녁 시간에 늦었다고 혼날 것이다. 시무룩하게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의 뒤엔 쇠사슬에서 놓여 난 언어들이 둥둥 떠다닌다. 내일 다시 놀자고 한다.
황수현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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