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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최일화 “35년간 병상에 누워 계셨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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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최일화 “35년간 병상에 누워 계셨던 아버지”

입력
2016.08.1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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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최일화씨가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으며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민규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탤런트 최일화씨가 어린 시절 기억을 더듬으며 아버지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김민규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어, 저 자식 일화 아냐?”

나는 아버지의 리어카를 뒤에서 밀고 있었다. 아버지는 동네 언덕길을 힘겹게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때 마침 학교 친구들이 내 모습을 봤다. 나를 처음 발견한 친구 옆에 섰던 녀석이 말했다.

“일화 아버지가 노가다꾼이었어?”

나는 손을 놓고 터벅터벅 걸어서 샛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 것도 못 들은 척, 샛골목에 몸을 숨겼다.

“어엇!”

내가 리어카를 놓아버리자 아버지는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리어카의 속도가 빨라졌다. 우탕탕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뒤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걸었다. 입술을 꽉 깨물고서.

그날 저녁 아버지는 얼굴이 시퍼렇게 부어오른 채 들어왔지만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낮에 얼굴을 마주친 적이 없는 것처럼, 혹은 그 사이 낮에 있었던 일을 새까맣게 잊었다는 듯이.

아버지는 내 중학교 졸업식과 고등학교 졸업식에 오지 않았다. 아버지가 리어카로 공사장에서 벽돌이며 모래를 나르거나 쌀 배달을 다니는 모습을 본 친구들이 많았을 거였다. 그 ‘노가다꾼’이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내가 친구들 사이에서 놀림감이 될까봐 걱정하셨던 것이다. 나는 그런 아버지가 내심 고마웠다.

성공한 아들과 금의환향 하고 싶었던 아버지

나는 아버지가 유쾌하게 웃으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내내 힘들어 하거나 앓는 모습이 전부였다. 아버지는 내게 늘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분이었다. 사실은, 우리 가족의 일상이 바로 그랬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무일푼으로 인천에 올라와 리어카로 생계를 꾸려나가셨다. 어머니는 어릴 적 앓은 소아마비로 몸이 불편했고 맏이인 나는 겨우 초등학생이었다. 오로지 아버지의 근력으로 가족을 지탱할 수밖에 없었다.

방이 너무 좁았다. 내가 중학교에 올라갈 즈음엔 똑바로 누워서 잠잘 수가 없었다. 부모님과 나를 포함한 네 남매 모두 몸을 옆으로 틀어야 겨우 누울 수 있었다. 나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친구 집에서 잤다. 나라도 하나 빠져야 동생들이 편하게 잘 수 있겠단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그런 환경에도 중학교 때는 학교에서 명문대 진학을 예상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지만 결국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아버지의 낙담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그럭저럭 공부 잘하는 아들을 둔 가난하고 꿈 많은 아버지들이 으레 그러했듯이 내가 서울대를 진학해 번듯하게 자리를 잡은 다음에 고향으로 금의환향을 하고 싶어 했다. 그 꿈이 산산조각 난 거였다.

여기까지만 해도 우울하기 이를 데 없는 기억들로 채워졌지만, 이후로는 더 혹독한 삶이 찾아왔다. 내가 제대를 보름 앞두었을 무렵 아버지가 쓰러졌다. 뇌졸중이라고 했다. 놀라긴 했지만 뜻밖의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의 육체노동은 평범한 수준을 뛰어넘었다.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리려고 닥치는 대로 일을 했고 지나친 노동은 육체에 무리를 주기에 충분했다.

20년 넘게 막노동에 찹쌀떡 장수, 긴 무명 생활

제대 후 나는 공장으로 들어갔다. 명문대생의 꿈은 결국 ‘공장’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막막한 현실 때문이었을까, 나는 우연히 엉뚱한 꿈을 품게 되었다. 바로 연극 배우가 되는 것이었다. 아니 그보다 무대에 서서 멋지게 내 목소리를 내보는 것이라고 해야 옳겠다. 계기가 있었다.

그 시절 공장 직원들을 모아놓고 강당에서 연극을 했다. 연극을 보고 난 후 내 감상평은 이것이었다.

“저게 연기라면 나도 하겠다. 연극 쉽네!”

만만해 보였다고 하는 게 옳겠다. 조금만 연습하면 나도 무대에 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거기다 ‘나는 저 배우들처럼 목소리를 높여서 외가리처럼 외치거나 오버하지 말아야지.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멋있는 연기를 해야지’ 하고 나름의 연기관까지 구축했다. 시작을 하기도 전에 벌써 고집을 만든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나의 착각이었다. 아무도 내 연기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2~3년 만에 무대에 서긴 했지만 대사가 없거나 한 두 마디 뱉고 내려오는 게 전부였다. 선배들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연기는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었다. “그만두고 막노동을 하거나 탄광에나 가라”는 것이었다. 진심으로 그런 충고를 했다.

서울로 올라와서 극단 생활과 아르바이트를 겸했다. 말이 아르바이트지 생계를 꾸리기 위한 투쟁이었다. 제일 먼저 한 일은 쓰레기 청소였다. 야간에 남대문이나 명동에 가서 쓰레기를 치웠다. 리어카를 끌고 다니면서 쓰레기를 다 실어 옮긴 뒤에는 리어카를 옆으로 세우고 그 안에 들어가 새우잠을 잤다. 막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상하수도 공사나 도로 정비, 지하철 공사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오전에 막일을 한 뒤에 저녁에 극단으로 나간 적도 많았다. 겨울에는 찹쌀떡과 메밀묵을 팔았다. 이 일이 내가 가장 오랫동안 한 일이었다. 15년 동안 골목골목을 다니면 “차싸알떠억, 메이일무욱!”을 외치고 다녔으니까. 포장마차를 차린 적도 있었다. 장사가 쏠쏠할 때도 있었지만, 잘 되자마자 접었다. 연극을 향한 일편단심이 흔들릴까 해서였다. 속에서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답답해지면 훌쩍 강원도로 떠났다. 탄광으로 향한 것이었다. 20대를 통틀어 3번이나 탄광촌에 다녀왔다.

“드라마 해라” 제의 거절한 이유는

막막한 시간이 하염없이 흘러갔다. 같이 출발했던 동료들이 주연을 꿰차고 영화로 드라마로 진출할 동안 나는 여전히 조연이었다. 아니 배우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더 많았을지도 모른다. 극단에서 내가 하는 일은 대부분 포스터를 붙이고 표를 팔고 카페 같은 곳에 전단을 비치하러 다니고, 극단 안에 들어와서는 연기보다는 무대를 꾸미거나 소품을 제작하고 극 중간 중간에 폭죽을 터뜨리기도 했다. 극단 ‘일꾼’이나 조수에 가까웠다. 나는 배우가 아니었다. 마흔 셋이 될 때까지 포스터를 붙이고 다녔다고 하면 누가 믿을까.

아르바이트에 잡일로 몸은 피곤했지만 연습은 누구보다 열심히 했다. 찹살떡을 팔러 다닐 때는 3시쯤에 장사가 끝나고 나면 담배 한갑이나 김밥 한줄을 사들고 문예회관 대극장(현재 아코르대극장)으로 갔다. 수위아저씨에게 준비한 ‘뇌물’을 건넨 뒤 지하로 내려가 3~4시간 연습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10년 넘게 개인 연습에 몰두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에 분노가 쌓였다. 왜 나를 알아주지 않을까. 연극을 한 지가 벌써 얼만데 왜 제대로 된 배역은 주지도 않고 스텝 일만 시키는 걸까. 언제까지 아르바이트로 버텨야 하는 걸까. 답답하고 분했다. 선배들 말마따나 배나 타버릴까 하는 생각이 몇 번이고 용솟음쳤다.

단순히 잘되겠다는 생각은 아니었다. 배우로 인정을 받고 싶었다. 내 처지를 안타깝게 여긴 갑수 형(김갑수)이 드라마 대본을 들고 왔다. “이거 10부작이 넘어. 이거 한편 찍으면 너 알바 몇 년 뛴 거보다 많이 받을 수 있어.” 그때마다 나는 거절했다. 당당하게 인정받아서 피디가 직접 나에게 요청을 해오기 전까지는 카메라 앞에 서기 싫었다. 안 됐으면 안 됐지 낙하산은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내 처지에 열 번 넘게 갑수 형의 제의를 거절했다.

연극을 본 아내 장미를 건네며 눈물 뚝뚝

나에게 새로운 계기가 찾아온 것은 결혼한 뒤였다. 나는 38살에 아마추어 연극배우로 활동하던 아내와 결혼했다. 결혼하고 3년째 되던 해던가 아내가 연극을 보러 왔다. 그때는 대사가 제법 됐다. ‘이대로만 하면 나도 연극배우로 완전히 자리를 잡겠구나’하는 생각을 하던 때였다.

연극을 본 아내는 내게 장미꽃 한 송이를 사왔다.

“난 자기가 참 편안해. 일상의 모습을 그대로 무대로 옮긴 것 같아. 집에서나 무대에서나 한결 같아.”

아내가 연기를 이해해주는 구나 싶었다. 장미 한 송이가 태양처럼 내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는 것 같았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내 굵은 눈물방울을 쏟았다. 아내의 손을 잡고 있는 내 손등에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너무도 당황스러웠다.

“배우는 집에서 말하는 것과 무대 위에서 말하는 게 달라야 하는 거 아냐? 무대에선 연기를 하는 건데 어떻게 평상하고 똑같은 거야.”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혀를 움직여 무슨 말을 하기에는 머릿속이 너무 복잡했다.

그날, 밤새 잠을 못 이루었다. 머릿속에서 성벽처럼 견고하던 생각의 탑들이 하나씩 하나씩 무너져 내렸다. 내게 신앙 같은 생각들이었다. 나름의 연기관과 인생관으로 똘똘 뭉친 나를 아내가 가장 곡진하고 진심어린 충고로 무너뜨린 거였다.

쌀가마니를 이고 50 계단을 한번도 쉬지 않고 오르신 아버지

폐허가 된 생각의 광장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헉헉, 아버지가 숨 가쁘게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초등학생 시절, 아버지는 리어카로 쌀 배달을 하셨다. 간혹 수도국산을 오를 때가 있었다. 거기에 수도국(水道局)이 있어서 붙은 이름이었다. 아버지는 쌀을 어깨에 메고 한번도 쉬지 않고 긴 계단을 단숨에 오르셨다.

“아빠 쉬어가세요.”

내가 아버지를 따라가며 걱정스럽게 말했지만 아버지는 한번도 발길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아버지 옆에 나란히 걸으며 계단 숫자를 세었다. 오십 개가 넘었다.

계단을 다 오르고 나서야 쌀자루를 내려놓고 잠시 쉬었다. 무정한 도시를 내려다보시며 담배를 빼 물었다. 느긋하게 내뿜는 담배연기와 달리 아버지의 손발은 혹한이나 닥친 것처럼 달달 떨었다. 수도국산을 단숨에 오르지 못하면, 그깟 계단 오십 계단 하나 단숨에 올라내지 못할 정도로 나약해선 가족들을 먹여 살릴 수 없다고 생각하셨을 지도 모른다. 아버지는 스스로 약해지는 것을 경계하셨다.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자기 몸을 조금씩 부수어가며 일하셨다. 나는 내 꿈만 쫓았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공부에 생계에 힘들어 할 때, 나는 세상 혼자 사는 것처럼 무대에서 멋진 역할 한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몸이 불편한 어머니가 한동안 떡 장수를 했다. 방앗간에서 떡을 떼와서 대로변 한구석이나 골목골목을 다니며 팔러 다녔다. 언젠가 어머니가 얼굴에 피를 흘리며 들어오셨다. 알고 보니 아이들이 돌을 던진 거였다. 소아마비를 앓은 몸으로 큰 대야를 머리에 이고 다니는 모습이 아이들에게 낯설었던 듯했다. 몇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지만 어머니는 기어코 장사를 하려고 하셨다. 떡 장수를 그만두신 후에는 호떡을 구워 파시기도 했고, 파출부나 음식점 종업원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아픈 아버지를 돌보시면서 그 모든 일들을 다 하셨던 거였다.

동생들은 동생들대로 학교에 다니면서 온갖 아르바이트를 다 했다.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일해서 받은 돈으로 가계에 보태라고 어머니 앞에 봉투를 내밀던 동생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아버지는 얼마 안 가 말을 잃었다. 몸이 멀쩡할 때도 힘겹던 살림살이였다. 쓰러지신 후에는 가장으로서 더더욱 면목이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말을 잃어버린 것이 내심 다행으로 여기셨을지도 모른다. 입을 열 수 있어도 해줄 말이 없었을 테니까.

때로 아버지는 골방에서 엉금엉금 기어 나와 바다로 갔다. 한 팔로 쌀자루 같은 몸을 아득바득 끌면서 파도가 넘실대는 해변까지 기어가셨다. 마을 사람들이 발견해서 다시 방으로 옮기지 않았다면 아버지는 바다로 들어가서 다시는 나오지 않으셨을 것이다. 그렇게 일곱 번이나 자살 시도를 하셨다.

아버지가 자살을 하셨다면, 우리는 화가 나서 돌아가셨다고 했을 것이다. 얼마나 분하셨을까. 젊은 날의 꿈이 사라진 뒤에, 가족을 위해 일할 수도 없는 몸이 된 자신에게 얼마나 화가 나셨을까.

“아아아악!”

아버지는 새벽만 되면 소리를 질렀다. 새벽 한 시부터 네 시까지 통증이 심해졌다. 아버지는 미늘처럼 파고드는 통증을 벗겨내려고 있는 힘껏 비명을 토해내신 거였다. 그건 아마 분노의 외침이었을 것이다. 당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에 대한 분노, 그 분노가 비명이 되어 터져 나온 게 아니었을까. 아버지에게 남은 것은 분노와 고통을 표시할 수 있는 기괴한 음성이 전부였다.

씨름 선수 아버지, 10:1로 싸운 사연

젊은 시절의 아버지는 그렇지 않았다. 아버지는 고향에서 공무원이셨다. 별 일 없었다면 나도 고향에서 모범생으로 자라 아버지 뜻대로 판검사가 되었을 수도 있었다. 불법 선거만 없었다면.

아버지는 불법 선거에 발을 담그고 싶어 하지 않으셨다. 고무신을 돌리고 막걸리를 사고, 봉투로 사람을 매수하던 시절, 아버지는 그 모든 ‘선거 활동’을 완강히 거부하셨다. 주변에서 아버지를 으르고 협박했지만 절대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번은 그런 일이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열 명쯤 되는 장정들이 아버지에게 노골적으로 이죽거렸다.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마을이 다 같이 잘 되자고 그러는 건데 왜 혼자 중뿔나게 그러냐”는 내용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일화야, 잠깐 저기 가 있어라”하고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상대가 열 명이었지만 나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어깨가 먼 산의 능선과 겹쳤다.

아버지는 씨름 선수였다. 머리도 좋았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모두 전교회장을 맡았다. 리더십에 운동까지 잘했기 때문에 감히 덤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날 아버지에게 시비를 건 청년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버지는 청년들과 싸웠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멀쩡하게 집에 들어가셨다.

아버지는 끝내 고향을 떠나셨다. 불의한 일에 머리를 숙이느니 차라리 고향을 떠나는 편을 택하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으셨다. 탯줄을 묻고 흙내와 바람 냄새마저 정겨운 고향을 마음에서 먼지처럼 털털 훌훌 털어버리고 떠나오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나는 중학교 때 야간 공업 고등학교를 가겠다고 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인문계를 진학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를 거역했다. 나는 현실을 보자고 했고 아버지는 공부에 매진하라고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공장으로, 공장에서 다시 연극판으로 뛰어들었다. 희망의 8할이던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저버린 후, 아버지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동료와 친구들의 외면과 탈향, 아들의 반항까지, 깊어질 데로 깊어진 외로움과 어쩔 수 없는 당신의 처지에 대한 자각이 겹쳐 결국 분노가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바다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싶어 발버둥치시던 아버지는 결국 치매를 얻었다. 현실에 실망하다 못해 그 현실을 까맣게 지워버리신 것이었다. 돌아가시기 15년 전부터 사람도 알아보지 못했다.

마음엔 늘 집에 누워 있는 아버지가 맴돌았다. 극단을 향할 때도, 후배들과 연습에 매진할 때도, 무대에 설 때도, 내 마음의 절반을 아버지가 차지하고 누워 있었다. 그러나 그 부담이 나를 맹렬히 채찍질했다고, 그래서 연극을 더 열심히 한 거라고 말할 순 없다. 그건 변명이다. 나는 그냥 내 삶을 살았을 뿐이다. 나는 아버지와 비교해서 100배 1000배 못난 인간일 뿐이다. 나밖에 몰랐으니까. 나는 그저 나를 위해 살았을 뿐이었다.

삼류배우, “저기 산 송장 지나간다!”

아내에게 뜨거운 조언을 들은 후 나는 새출발을 했다. 내가 신앙처럼 믿고 있는 연기의 진리들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선배들의 조언도 새롭게 다가왔다.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기처럼, 신인 중의 신인처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몇 년을 연기에 매진했다.

그래도 잘 안 됐다. 내 나이 마흔 하고도 사 년이 흘렀을 때였다. 나는 탄광으로 가든 배를 타러 가든 할 생각이었다. 아이도 태어났고, 아버지는 여전히 누워계시고, 동생들에게 맏이 노릇도 해야겠고, 이제라도 돈을 벌어야겠단 생각이 들었던 거였다. 아버지처럼, 수입이 많든 적든 몸이 부서져라 가족을 위해 일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주변을 정리하려는 찰나 뜻밖의 소식이 들려왔다. 내 연기 인생의, 아니 내 인생 자체의 터닝포인트가 될 일이었다. 처음으로 상을 탔다. 동아연극상 연기상이었다. 수상하는 날 관계자가 내게 말했다.

“올해부터 연극상을 없앨 계획이었는데 최일화 씨 때문에 다시 상패를 만들었습니다. 최일화 씨는 수상자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없어질 뻔한 동아연극상의 명맥을 잇는 역할을 하셨습니다.”

상을 받아들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좋아서가 아니었다. 아버지를 비롯해 나 때문에 고생한, 어찌 보면 희생당한 사람들에게 너무 미안해서였다.

상을 받고 나서 ‘삼류배우’라는 작품에 주연을 맡았다. 나의 체험이 녹아있기도 했지만 이제는 사람들이 ‘진짜 배우 최일화’를 보러 온다는 생각에 혼신의 힘을 다해 연습했다. 죽지 않을 만큼, 정말 이렇게 하다가 죽겠다 싶을 만큼. 한 달쯤 지나자 사람들이 나에게 말했다.

“저기 산 송장 지나간다.”

몸무게가 10kg이나 빠졌다. 크지도 않은 체구에 살이 그만큼 빠진 모습에 “저러다 쓰러지겠다”고 걱정하는 동료들이 많았다.

연극이 잘 됐다. ‘삼류배우’ 이후 캐스팅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형’이나 ‘선배’가 아니라 영화감독과 피디, 연출자들은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나는 기꺼이 그들의 부름에 응했다. ‘낙하산’이 아니니까. 잘하든 못하든 시도할 자격은 주어진 거라고 생각했다.

20년 후 알게 된 아버지 ‘뇌졸중’의 진실

촬영이 많아지면서 일정이 바빠졌다. 집에 있는 시간이 줄었다. 매일 집에 누워계시는 아버지 얼굴 보기도 힘들 때가 많았다.

마음 한켠에는 늘 잘해드리지 못한 부담감이 있었다. 드라마에서 부모를 극진하게 살피는 역을 맡거나 그런 연기를 할 때면 몰입이 잘 안 됐다. ‘집에 계신 아버지한테는 늘 퉁명스럽게 대하면서 카메라 앞에서 지금 내가 뭐 하는 건가’하는 자괴감이 들었던 거였다.

말씀도 못하시고 치매로 사람도 잘 못 알아보시는 아버지지만 나에겐 무언가를 말씀하려고 할 때가 간혹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나에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던졌다.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뜻이 헤아려지지 않았다. 다른 날보다 유난히 더 애를 써가며 말씀하시는 것 같았지만, 나는 다음 날 일정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새벽부터 촬영 준비를 해야 할 거였다. 나는 아버지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주무세요, 아버지.”

그렇게 밖으로 나와서 잠시 잠을 청한 후 새벽같이 일어나 촬영장으로 갔다. 차안에서 아내의 전화를 받았다.

“아버님이 숨을 안 쉬어요.”

나는 차를 돌렸다. 밤새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내가 문을 닫고 나간 뒤, 아버지는 혼자 방에 누워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셨겠지.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으셨을까. 아마 어머니 얘길 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불편한 몸으로 평생 험한 일을 하면서 30년 넘게 누워있는 남편의 수발을 드신 어머니를, 마지막까지 잘 모시라고 부탁하고 싶지 않으셨을까……. 마음에 품은 마지막 말도 온전히 전하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심정은, 얼마나 외롭고 서러웠을까.

얼마 후 드라마에서 (극중 아버지의) 장례식 장면이 있었다. 그 장면을 찍고 나서 이틀 동안 밥을 한 숟가락도 못 넘겼다. 내 마음에 맴돌았던 한 마디가 있었다.

‘불쌍한 우리 아버지…….’

십수 년 전 아버지와 관련해 모르고 있던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쓰러질 때의 이야기였다. 이전까지 우리 가족은 아버지가 과로한 몸으로 술을 마시다 쓰러지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날 막일을 하는 사람들이 그 식당에 많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들과 떨어져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들 중 하나가 시비를 걸어왔다. 세 사람이 달라붙어 아버지를 벽으로 던지듯이 밀어부쳤다.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머리를 다치신 거였다.

아버지의 생은 타인들의 폭력으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마지막 자존심과 가족을 지키려는 몸부림 외에 내 아버지가 세상에 모질게 하거나 해코지한 건 없었다. 그토록 철저히 짓밟힌 아버지에게 마지막 가시는 날까지 무심했던 내 자신이 너무 미웠다.

나도 어느새 아버지처럼...

아버지가 가신 지 벌써 3년이 흘렀다. 가끔 아버지가 건강하게 사셨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아마 아버지는 끝내 집을 일으키고 고향으로 돌아가 원래 마음에 품었던 꿈을 다 실현시키지 않으셨을까. 나 역시 젊은 시절의 짧은 방황 이후 제대로 자리를 잡고 아버지의 든든한 아들이 되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꿈꾸는 세상은 힘 있는 사람이 약자들에게 함부로 하지 않는 세상이었다. 땀 흘린 만큼 인정을 받고 각자의 자리에서 정직하게 살아가는 세상이었다. 약자에게 함부로 하고 정직한 룰을 훼손하는 이들을 극도로 혐오하셨다.

나쁘게 말하면 오지랖이 넓은 분이었다. 그저 실속만 차리면서 ‘조용히’ 살면 그만이었을 테지만, 아버지는 그런 것에 관해선 참지 않고 목소리를 내고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자 하셨다.

가만히 더듬어보면, 나도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나를 잘 아는 후배들이 나에 대해 하는 말을 다 종합해보면 내게 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고 했다.

최씨는 인터뷰 내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최씨는 인터뷰 내내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2015년, (사)한국연극배우협회 회장을 맡은 뒤부터 선후배들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다. 그중에서도 이름도 없이 큰돈도 못 벌고 무명으로 살아온 선배들에 마음이 많이 쓰인다. 문화 선진국들에는 연극 등 기저 문화에 헌신한 분들에게 다양한 혜택을 준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90% 이상의 연극배우들이 국가로부터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연극이 정규 교과목으로 채택돼 학생 때부터 연극을 접하며 자라도록 하는 몇몇 선진국의 교육 환경도 너무 부럽다. 우리나라는 국민의 94.7%가 평생토록 소극장 한번 방문해보지 않는다. 연극을 접할 기회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무명의 연극인들이 설 무대를 늘리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무대는 나처럼 우직하게 ‘언젠가 되겠지’ 하며 버티고 있는 무명의 후배들의 희망이고, 오로지 연극만을 생각하며 살아온 선배들의 마지막 자존심이다. 죽더라도 무대에서 죽고 싶은 게 배우들이다. 그 근본 욕구를 채워주는 것이 장(長)을 맡은 사람의 의무라고 믿는다.

언젠가 문화 관련 고위직 관계자에게 무대를 확충해야 한다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더니 기가 막힌 대답이 돌아왔다.

“누가 그 사람들보고 억지로 연극하라고 시켰습니까. 자기들이 선택한 운명인데, 지금 와서 잘 안 됐다고 이렇게 저렇게 해달라, 그게 말이 됩니까.”

그 순간에도 나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그릇된 생각과 정책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동료들의 비난에 시달려야 했던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느꼈을 고립감과 분노가 온몸을 훑었다.

아버지는 좌절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몸과 정신이 모두 망가졌지만 신념만은 무너뜨리지 않았다. 내가 때때로 세상에 대해 느끼는 절망감은 사지가 묶이고 입을 틀어 막히는 기분과 흡사하다. 눈앞이 깜깜해지는 순간이지만, 그때도 내 아버지가 보여준 모범을 따르고 싶은 욕구가 솟구친다. 내 마음에서 절망이라는 이름의 야수와 아버지가 남긴 신념이라는 맹수가 맞붙어 으러렁대는 형국이다.

나는 포기하거나 물러서기 싫다. 아버지가 당신이 꿈꾸는 세상을 끝내 마음에서 지우지 않은 것처럼 나 역시 마음에 품은 포부를 버리고 싶지 않다.

지금의 내 자리에서 아등바등 노력해 내가 무명 시절에 겪은 설움과 고통을 선후배들이 조금이라도 덜 겪을 수 있다면, 아버지가 당신의 온 삶으로 실천하신 일들에 대한 저항과 가까운 이들에 대한 사랑을 조금이나마 본받는 것이 되지 않을까. 아버지의 발치에도 못 닿는 못난 아들이지만 그래도 “애 썼다!”하는 칭찬을 듣고 싶다. 나에게 가장 훌륭한 모범을 보이진 아버지 앞에서 조금이라도 덜 부끄럽다.

김광원기자 jang750107@hankookilbo.com

사진 김민규기자 whitekm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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