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쎄요.” 지난 6월 열린 tvN 금토드라마 ‘굿와이프’의 제작발표회. 걸그룹 애프터스쿨 멤버인 나나(25ㆍ본명 임진아)의 캐스팅에 대해 행사장에서 만난 한 연예기획사 대표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연예계 관계자들은 배우 전도연의 11년 만의 드라마 복귀보다 나나의 출연에 어리둥절해 했다. 국내 드라마에 한 번도 출연한 적 없는 가수가 ‘굿와이프’에서 비중 있는 조연인 법률사무소 조사원 김단 역으로 낙점 돼서다.
연기력 검증이 안 된 걸그룹 멤버의 ‘굿와이프’ 합류를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드라마를 중국에 수출하기 위해 ‘걸그룹 멤버 끼워팔기’를 했다는 비아냥까지 나왔다. 방송 전 나나는 ‘칸의 여왕’ 전도연과 김서형 등 연기파 배우들 사이에 낀 미운 오리새끼 같은 존재였다.
나나를 둘러 싼 편견의 벽은 지난달 8일 ‘굿와이프’의 첫 방송 후 허물어졌다. 나나는 합법과 불법을 오가며 사건 해결의 단서를 제공하는 김단 역을 능숙하게 소화해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았다. 독특한 캐릭터에만 의존해 기본적인 발성과 발음이 안 돼 눈살을 찌푸리게 했던 다른 아이돌과는 달리 나나의 연기는 안정적이었다. 극중 변호사 김혜경을 연기하는 전도연의 기에 눌리지 않고, 무표정하고 도도하게 극을 이끄는 모습은 신선했다.
“엄청 연기 못할 줄 알았는데 다들 의외였다고 놀라시더라고요.” 드라마 촬영 중 짬을 내 16일 오후 서울 마포구 망원동 한 카페에서 만난 나나는 “‘발연기 논란’ 얘기 나올까봐 엄청 걱정했다”며 수줍게 웃었다.
쉽게 얻은 자리가 아니었다. 나나는 2015년 중국 후난위성TV에서 방송된 드라마 ‘상애천사천년’에서 함께 작업한 이정효 PD의 제안으로, 오디션을 “5번”이나 보고 역을 따냈다. 더 큰 난관은 지난 4월 닥쳤다. 4회 분량의 대본을 달달 외우고 첫 대본 읽기 모임에 나선 나나는 전도연과 대사를 주고 받다 소위 ‘멘붕’에 빠졌다. 전도연이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대사 톤과 표정으로 나나의 연기를 받으면서 나나가 준비했던 연기가 하나도 소용이 없게 돼서다.
자괴감에 빠진 나나는 고심 끝에 직접 전도연에게 휴대폰 문자를 보냈다. “너무 어려운 부탁”이라며 “어려운 부분이 많아 혹 대본 연습을 해 줄 수 있겠느냐”는 내용이었다. 나나는 “전도연 선배와 얽히는 장면이 많아 첫 촬영에 앞서 대사 톤을 맞춰 봐야 현장에서 누를 끼치지 않겠단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까마득한 후배의 열정에 놀란 전도연은 바로 “나야 좋지”라는 응답 문자를 보냈고, 나나는 다음 날 바로 전도연을 찾아갔다. 나나는 “전도연 선배 기획사 사무실에서 5시간 동안 대사 연습을 했다”고 촬영 뒷얘기를 들려줬다. 나나는 ‘악바리’였다. 1회 10초 분량도 안 되는 경상도 사투리 대사 소화를 위해, 애프터스쿨 동료로 경상도 출신인 리지에게 대사를 휴대폰으로 보낸 뒤 리지가 보낸 음성 파일로 억양을 익혀 카메라 앞에 섰다. 역동적인 조사원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청바지도 일부러 촌스럽거나 헌 것만 입었다.
나나는 “일을 할 때 물불 가리지 않는 건 김단과 비슷하다”며 웃었다. 실제로도 모험심이 많다. 그는 극중 양성애자인 김단 역을 제안 받고 “생전 처음 보는 캐릭터라 정말 매력적이었다”고 주저 없이 답했다. 새침해 보이는 외모와 달리 털털한 구석이 많다. 충북 청주시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와 2009년 가수로 데뷔한 나나는 동료들 사이에서 ‘허당 나나’로 통한다. 나나는 “진지한 것보다 워낙 장난 치는 걸 좋아하고 애교가 많아서”라며 웃었다. 개그우먼 이국주처럼 ‘여장부’라 불리는 여성 연예인들과 친분이 두텁다. 학창시절을 남녀 공학에서 보내 남자 친구들과도 허물 없이 잘 지냈다. 나나를 본명과 발음이 비슷한 “임진각”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편하게 대했단다.
나나는 데뷔 후 줄곧 ‘악플’에 시달려왔다. 늘씬한 몸매와 화려한 외모로 주목 받았지만, 노래 실력보다 외모가 더 부각돼 왔던 탓이다. 나나는 ‘굿와이프’ 덕에 자신에 대한 좋은 댓글이 많이 달리는 일이 낯설기만 하다. 배우로서 가능성을 보여준 덕에 김은숙(‘상속자들’ ‘태양의 후예’ 등) 작가도 나나를 탐냈다. 나나는 최근 김 작가의 tvN 새 드라마 ‘도깨비’의 오디션을 보고 왔다. 나나는 “김단과 정반대의 캐릭터라 흥미로웠다”며 설렜다. 그는 촌스러운 ‘B급 정서’가 도드라진 애프터스쿨의 유닛(소그룹) 오렌지캬라멜 활동을 준비하며 또 다른 ‘도발’을 꿈꾸고 있다.
“애프터스쿨로 섹시함을 보여주다, 오렌지캬라멜로 웃음을 드렸잖아요. ‘굿와이프’란 모험으로 저에 대한 선입견을 깼고요. 앞으로도 계속 모험을 하려고요. 제가 알지 못한 색깔을 찾으려 노력하며 고정된 이미지를 계속 깨나가고 싶어요.”
양승준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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