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잠깐 집을 비운 사이에 이웃사람이 수박을 가지고 와 대문에 걸어두고 갔다. 이런 일이 처음도 아니다. 인사를 나누며 지내는 이웃들은 큼직한 수박만 사면 혼자 사는 내가 생각나는 모양이다. 며칠 전엔 방송 일을 하는 이웃 여성도 수박을 쪼개 가지고 왔다. 덕분에 과일로 끼니를 해결하다시피 하면서 이것이 과연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인지 생각하게 된다. 물론 이 동네의 모든 사람들이 이런 모습으로 사는 것은 아니다.
내가 동네를 걷고 있던 그 시간, 눈앞에서 한 중년 여성이 호박잎을 팔러 다니고 있었다. 호박잎이 든 검은 비닐봉지 몇 개를 양손에 나눠 들고 기어드는 목소리로 내게 호박잎을 사라고 권했을 때도 나는 그녀가 뭔가를 팔려고 한다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귀에 들린 말이라곤 호박잎이라는 한 단어뿐이었다. 뒤늦게 제대로 알고 그 고행을 끝낼 수 있도록 몽땅 사주고 싶었지만, 내 주머니 속에는 대문 열쇠밖에 없었다. 그녀는 재차 권하지도 않았다. 나보다 몇 걸음 앞에서 걸으며 사람들에게 호박잎을 팔려고 했지만, 단 한 사람도 그녀가 뭔가를 팔려고 한다고는 생각지도 못하는 눈치였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날, 땡볕 아래서였다. 나는 지금껏 그처럼 주눅 들어 보이는 사람을 본 적도, 그처럼 소규모의 행상을 본 적도 없었다. 그 잿빛 삶의 모습에 콧날이 시큰했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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