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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 항아리 가득…황간에 가려거든 기차를 타세요

입력
2016.08.17 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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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간에 갈 때는 기차를 타는 게 좋겠다. 고속열차보다 느린 열차가 더 어울린다. 경부선이지만 KTX는 다니지 않는다. 지금은 가장 느린 열차, 무궁화호가 하루 15차례 정차할 뿐이다. 충북 영동군 황간역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곳곳에 놓인 옹기 항아리에서 시(詩) 익는 내음이 진하게 풍긴다. 동네 시화전에 등장하는 아마추어 시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충북 영동 황간역이 ‘시가 익는 역’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황간과 연인이 있는 문인들의 작품이 항아리마다 빼곡하다. 영동=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충북 영동 황간역이 ‘시가 익는 역’으로 되살아나고 있다. 황간과 연인이 있는 문인들의 작품이 항아리마다 빼곡하다. 영동=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기차는/앞으로 가는데/산은 뒤로만 가고

생각은/ 달려가는데/강물은 누워서 가고

마음은/날아가는데/ 기차는 자꾸 기어가고

현대시조문학의 대가 정완영의 ‘외갓집 가는 날’이다. 고향은 경북 김천이지만 오랫동안 외갓집이 있는 황간에서 지냈으니 시인에게 이곳은 시적 고향이나 마찬가지다. 이 뿐만이 아니다. 승강장과 역사(驛舍), 역 광장에는 농부시인 박운식과 한문수 박남균 윤남석 문경훈 허영자 등 황간과 이래저래 관계를 맺은 문인들의 시 120여 편이 80여 개 항아리와 기왓장을 고향의 향기로 진하게 물들이고 있다. 여기에 인근 옥천이 고향인 정지용의 ‘향수’, 안도현의 ‘철길’ 등도 간이역의 서정을 더하고 있다.

황간역은 올해로 111년이나 된 오래된 역이지만 시 항아리가 자리잡은 건 최근의 일이다. 2012년 부임한 강병규 역장이 쇠락해 가는 역을 되살릴 방법을 고민하다 지역 주민들과 협의해 ‘고향역’분위기 물씬 풍기는 문화공간으로 꾸며보자는 결정이 시작이었다. 주민들에게 친숙한 항아리를 작품 전시 소재로 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여기에 전문적으로 미술공부를 해 본 적도 없다는 역장의 그림 솜씨가 단단히 한 몫 했다. 시를 쓴 항아리마다 주제에 맞게 아크릴물감으로 향토색 짙은 그림을 입혔다.

강병규 역장의 철도사랑과 손재주는 대합실 전시장에서도 볼 수 있다. 사진으로만 남아있던 1950년대 황간역의 모습을 재현한 모형이 그것이다. 황간역은 일제시대 다른 역사와 달리 삼각지붕 출입구를 정면 중앙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치우쳐 배치한 몇 안 되는 건물이다. 또 외부에서 보면 2층이지만 내부는 천장이 높은 1층인 것도 흔치 않은 구조다.

미니어처에 스토리를 입힌 섬세함도 돋보인다. 새침데기 여학생과 껄렁한 남학생, 젖먹이를 엎은 젊은 아내가 상경하는 남편을 배웅하는 모습, 잘 익은 홍시를 한 광주리 가득 담아 대전으로 팔러 가는 아주머니, 동네 개구쟁이와 강아지 등 1970년대 어느 가을날 황간역을 재현한 모습은 한편의 동화를 보는 듯하다.

매달 진행하는 가곡음악회도 오래된 간이역이 지역의 문화영토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노력으로 폐역 위기에 처했던 황간역엔 기차를 타지 않던 주민들의 발길이 늘어나고, 일부러 황간역을 찾아오는 외지인도 불어나 수송기능이 되살아나고 있다. 요즘은 평일엔 하루 150~200명, 주말엔 300명 정도가 황간역을 이용하고 있다. 황간역 왕복 승차권을 소지한 여행객에게는 역에서 자전거도 무료로 대여하고 있다.

▦자전거로 갈 수 있는 황간의 여행지

황간역에서 3km가량 떨어진 한천팔경. 달도 쉬어간다는 월류봉을 중심으로 아기자기하면서도 웅장한 풍경이다.
황간역에서 3km가량 떨어진 한천팔경. 달도 쉬어간다는 월류봉을 중심으로 아기자기하면서도 웅장한 풍경이다.

충북에서 가장 남쪽 영동군의 한적한 시골마을에 불과하지만 황간엔 볼거리가 적지 않다.

우선 갈 곳은 황간역에서 3km 남짓한 초강천 굽이의 한천팔경. 달도 반해 머무른다는 월류봉(月留峰)을 중심으로 연결된 5개 봉우리와, 산줄기를 휘감는 강줄기가 빚은 풍경이 옛날 이발관에 걸린 그림처럼 아련하다. 한눈에 들어올 만큼 아담하면서도 산세는 깎아지른 듯 우람하다. 해발 400m 월류봉까지는 걸어서 약 30분, 정상에서 내려다 보면 금강으로 흘러 드는 초강천 물길이 또 한 폭의 그림이다. 우암 송시열이 후학을 가르치며 머문 ‘한천정사’가 인근에 있어 한천팔경이라 이름 붙였다.

한천팔경 조망대에서 약 6km 물길을 거슬러 반야사까지 이어지는 석천계곡도 자전거로 다녀오기 안성맞춤이다. 백화산 자락에 폭 안긴 아담한 규모의 반야사 외에 특별한 볼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한적한 시골 정취를 즐기기에 그만이다.

황간역에서 한천팔경 반대편 영동읍내로 이어지는 국도로 약 4km를 이동하면 한국 현대사의 한 장면이 멍울진 ‘노근리 사건’ 현장이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초기인 1950년 7월 미군의 유도에 따라 영동에서 황간으로 피난하던 500~600명의 주민들이 황간면 노근리 부근 경부선 선로에서 되레 미군에 의해 집단 학살당한 비극이다. 노근리 쌍굴다리로 알려진 개근철교 콘크리트 옹벽에는 다리 아래로 피신한 주민들을 향해 난사한 총알자국이 마른 바닥에 떨어진 굵은 빗방울처럼 선명하게 남아 있다.

쌍굴다리 인근에는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노근리 평화공원’을 조성했다. 위령탑을 세우고 교육관을 만들어 전쟁의 비극과 평화의 가치를 되새기는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포도밭 그 사나이, 영동 포도와 와인

영동 ‘와인코리아’의 오크저장고
영동 ‘와인코리아’의 오크저장고
와인에 재운 삼겹살. 영동에는 43개 와이너리가 영업하고 있다.
와인에 재운 삼겹살. 영동에는 43개 와이너리가 영업하고 있다.

탤런트 윤은혜와 오만석 주연의 드라마‘포도밭 그 사나이’(2006년) 방영 이후 포도 산지로 유명해졌지만, 영동에서 포도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은 그보다 한참 전인 1960년대부터다. 포도농사에 비가림 시설과 봉지 씌우기 농법을 처음 시작한 곳도 영동이다. 지금도 전국 포도의 12% 가량을 영동에서 생산하고 있다.

와이너리를 운영하는 농가만도 43개에 이른다. 노근리 평화공원에서 약 6km 떨어진 ‘와인코리아’는 국내 최대 와인생산 공장이다. 와인갤러리와 저장고를 둘러보는 투어프로그램과 와인족욕체험(20분), 포도따기체험(1인 2kg)을 운영한다. 주 2회 서울역~영동역을 운행하는 와인트레인을 이용하면 국악체험촌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25~28일까지 4일간은 영동포도축제가 열린다. 포도 따기와 밟기, 와인 만들기와 족욕 등 오감만족 체험 프로그램과 영동 농산물 시식·판매행사를 진행한다. 김응상 한국관광공사 세종충북지사장은 “난계 박연의 고향인 영동은 국악과 와인이 어우러져 멋들어진 풍류를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여행지”라고 추천했다.

영동=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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