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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어설픈 분칠 좀 그만 하시라

입력
2016.08.17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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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진한 핑크색으로 칠해 주세요.”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이 막바지로 치닫던 1965년 초 김동조 당시 주일대사는 이렇게 일본 측에 ‘분칠’을 호소했다. 자존심을 구겨가며 사실상 과거사를 깡그리 봉인하는 대가로 받아낸 일본의 경제원조를 한 푼이라도 더 부풀리고 그 명목을 조금이라도 더 두루뭉술하게 표현하면 “한국 국내에서 설명하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분칠의 역사는 이후에도 끊임없이 되풀이됐지만 요즘에는 학계에서까지 어지러운 분내가 진동한다.

한국에서는 거의 주목받지 못했지만 지난달 31일 일본 도쿄대에선 위안부 문제에 관한 심상찮은 심포지엄이 열렸다. 한일 정부가 지난해 말 완전하고 불가역적으로 해결하기로 한 이른바 ‘위안부 합의’에 어떻게 “혼을 불어넣을까”라는, 취지부터 뜨악한 지정과제를 놓고 한일 전문가들이 제각각 ‘커밍아웃’을 했다. ‘위안부 합의’에 근거한 이른바 ‘화해ㆍ치유재단’이 논란 속에 출범을 강행한 직후에, 사실상 이를 지지하기 위한 심포지엄이 일본 한복판에서 열린 것도 의아스러웠지만, 무엇보다 내 신경을 곤두서게 한 것은 이른바 지일파(知日派)를 자임해온 일부 한국 정치학자들의 위안부 문제 분칠이었다.

서울대 A교수는 최근 수년간 한일관계가 꼬여버리자 “일본은 한국이 중국에 경사됐다고 생각했다”면서 “그런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위안부 합의’를 통해 한일관계를 다시 돌려놓는 계기가 마련됐다면서 어떻게든 합의를 살려나가자고 목청을 높였다. 중대한 역사인식 문제이자 인권문제이기도 한 위안부 문제를 국제정치적인 ‘힘의 논리’로 깔아뭉개려는 곡학아세도 놀랍거니와, 한일관계를 무슨 당연한 ‘접착제’로 간주하는 현실인식에는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여기에 더 과감한 분칠이 가해졌다. “죽은 다음에 명예회복이 무슨 소용인가.” “근본적 문제 해결을 위해 어떻게 천년을 기다릴 수 있나.” 위안부 피해자들이 삶의 끝을 눈앞에 두고 있으니 다소 미흡하더라도 이쯤에서 받아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엄청 피해자를 위하는 듯하다. 하지만 고령의 피해자들은 지난 4반세기 동안이나 ‘근본적 문제 해결’, 즉 일본의 진정한 사과와 배상을 요구하며 처절하게 싸워왔다. 한일 합의에 이런 피해 당사자들의 희망은 빠져 있다. 대신 ‘10억엔’이라는 분칠만 또렷하다. 이런 마당에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받아들이라고 다그치는 것은 고령의 피해자를 또다시 농락하고 겁박하는 것 아닌가.

역사 문제와 관련해 장관급 직책까지 역임한 B교수는 위안부 문제가 외교 이슈가 된 이상 타협할 수밖에 없다면서 “아베 신조 총리와 박근혜 대통령은 같은 배를 탔다”고 말했다. 또 다른 서울대 C교수는 이번 정부 간 합의가 등산에서 정상 등정을 위해 설치하는 ‘베이스캠프’와 같다면서 “명예를 지켜 옥쇄(玉碎)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그럴 듯해 보이지만 ‘말의 향연’이자 ‘물타기’에 다름 아니다. 위안부 문제가 한일 정부 간의 ‘밀실 담합’에 의해서, 그것도 피해자의 목소리가 철저히 무시된 가운데 불가역적으로 처리됐다는 본질을 외면한 채 어떻게 앞으로 잘 해보자고만 말할 수 있나.

일부 지일파 정치학자들의 주장을 들으면서 솔직히 100여년 전 나라가 망할 때 이런저런 분칠을 하더니 결국은 일제에 기생한 일부 친일파 선비들의 모습을 동시에 떠올렸다. 과민반응이자 착시현상일 것이다. 그들의 주장에도 분명히 근거가 있다. 더 치열한 논쟁이 필요하다. 다만 그들이 ‘위안부 합의’를 정당화하기 위해 강조하는 ‘국익’은 그들만이 그리는 국익이지 검증된 것도 아닐뿐더러 그리 돼서도 안 된다는 점만은 말해두고 싶다. 아무리 화장을 덧칠하더라도 위안부 문제의 맨얼굴은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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