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북한 간부와 주민을 별도로 호명하며 통일 시대에 동참해줄 것을 촉구하면서 ‘북한 체제 붕괴론’이 다시 고개 들고 있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북한 붕괴론을 부인하지만 지난 1월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박 대통령의 발언과 정책 선택이 이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관측이 적지 않았다. 박 대통령이 한 걸음 더 나가 김정은 정권과 분리해 간부와 주민에게 직접 통일 메시지를 발산, 북한 붕괴론에 기반해 더욱 공세적인 대응에 나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경축사에서 북한 김정은 정권에 대한 제안은 일체 없었다.
‘북한 붕괴론’은 남북 상호 체제 인정과 내부 문제 불간섭 등을 규정한 남북기본합의서를 비롯해 모든 남북합의 사항에 어긋나는 것이다. 정부가 공식 거론하거나 현실 정책으로 채택할 수 있는 사안도 아니다. 현 정부도 4차 핵실험 후 개성공단 가동중단 등 강경 압박 정책을 펴면서도 “북한의 전략적 셈법을 바꾸기 위한 것”이라며 표면적으로는 북한 붕괴론과 거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1994년 김일성 사망, 2008년 김정일의 뇌졸중 발병, 2011년 김정일 사망, 2013년 장성택 처형 등 북한 최고위층의 신변에 이상이 있을 때마다 ‘북한 붕괴론’은 정권 주변에 무성하게 퍼졌다. 실제 대북 정책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외교안보가의 정설이다. “조만간 북한이 무너질 것”이라는 전망으로 인해 장기적인 통일 환경을 구축하기 보다 단기적 대북 전략에 집중했다는 것이다. 김영삼 정부와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현 정부 들어서도 북한 2인자인 장성택이 처형된 2013년 말 남재준 당시 국정원장이 “2015년 통일”을 언급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북한 붕괴론’의 끈질긴 생명력을 재차 확인시켰다. 2014년 초에 나온 ‘통일 대박론’도 통일 과정이 생략된 상태에서 뜬금 없이 제기돼 붕괴론을 상정한 것이란 얘기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붕괴론의 예측과 달리 북한은 고난의 대행군으로 불리는 1990년대 식량난과 2000년대 탈북 사태, 2010년대 3대 세습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붕괴론도 약화하는 듯 했으나 4차 핵실험 이후에는 다른 형태의 담론으로 진화하는 상황이다. 이전 붕괴론이 “북한이 경제 악화와 리더십 위기로 조만간 무너질 것”이라는 ‘전망’의 형태였다면 이번에는 “북한의 핵 위협을 막을 방법은 북한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 밖에 없다”는 ‘당위성’이 결부되고 있다. 김정은 정권이 2012년 핵 보유를 헌법에 명시하고 4차 핵실험까지 감행하면서 ‘북한 붕괴’가 눈 앞에 닥친 북한의 핵 위협을 제거할 유일한 수단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북한이 조만간 무너질 것”이란 붕괴론이 “북한 정권을 붕괴시켜야 한다”는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로 변한 셈이다.
올해 들어 박 대통령도 수정된 붕괴론인 ‘정권 교체론’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니냐는 분석이 많다. 한 전직 외교 관료는 “박 대통령이 북한의 체제 붕괴를 직접 경고한 올 2월 국회 연설에서부터 북한의 ‘레짐 체인지’를 결심한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정부 당국자들 사이에서도 ‘북한 붕괴론’을 부인하면서도 “4차 핵실험을 통해 북한이 핵을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게 확인 된 게 아니냐”는 얘기가 자주 나왔다.
하지만 북한 체제를 붕괴시키는 능동적 정책 수단이 우리 정부에 없다는 점에서 수정된 북한 붕괴론 역시 ‘공허한 당위론’에 그치고 있다는 지적이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취할 수 있는 방법은 고작해야 대북 확성기, 대북 방송, 대북 전단지 살포 등을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외부 정보를 유입시키는 정도가 꼽힌다. 박 대통령이 북한 간부와 주민들에게 통일 메시지를 발산한 것도 그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수단이 북한 주민들의 변화를 자극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이는 소수에 불과하다.
실제로 북한 체제를 흔들 수 있는 대북 제재의 정책 수단을 쥔 곳은 우리가 아니라 중국이다. 하지만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ㆍ사드) 배치 결정으로 중국이 등을 돌리면서 북한 붕괴론의 기반은 더욱 허약해져 있다. 김용현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이 자체 붕괴할 가능성은 극히 낮고, 중국이 이를 원하지도 않는다”며 “북한 붕괴론은 객관적 현실을 보지 않는 주관적 틀이며, 이를 전제로 한 대북 정책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ankookilbo.com 조영빈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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