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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양궁, 현실의 판타지

입력
2016.08.16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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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데자네이루 마라카낭 삼보드로무에서 열린 남자 양궁 개인전에서 우승한 구본찬이 환호하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리우데자네이루 마라카낭 삼보드로무에서 열린 남자 양궁 개인전에서 우승한 구본찬이 환호하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김희원 사회부장 hee@hankookilbo.com

2003년 최고의 인기 드라마는 MBC TV ‘대장금’이었다. 궁중 수라간의 맛깔스러운 요리과정과 “맛을 그려보아라”와 같은 명대사로 경이로운 시청률 55.5%를 냈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따로 있다. 장금이(이영애)-한 상궁(양미경)과 대립하는 금영(홍리나)-최 상궁(견미리)이 수라간의 실권을 잡기 직전, 무(無)계파의 정 상궁(여운계)이 수라간 최고상궁이 된 순간이다. 장독대에서 소리나 즐기며 권력 같은 건 안중에도 없던 정 상궁은 최고상궁이 되자 놀라운 리더로 돌변했다. 우선 ‘절대미각’을 앞세워 최 상궁의 후계자로 점지돼 있던 금영에 대한 특별대우를 해제하고 실력을 토대로 한 나인 선발제도를 정착시켰다. 최 상궁 측의 반발은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한 것이온데 왜 홍시냐고 물으시면…”이라는 장금이의 대사를 남긴) 식재료 블라인드 테스트를 거침으로써 원천봉쇄했다. 돈과 권력, 권모술수를 다 갖춘 가문을 합리적 절차로 제압하고 수라간의 새 질서를 구축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대장금’은 역경을 이겨낸 영웅담이 아니라, 실력이 인정받고 상식이 통하는 판타지의 드라마로 각인되었다.

그렇다. 상식의 승리는 판타지일 것이다. 검사가 사업가로부터 수백억 가치의 비상장 주식을 공짜로 받고, 부장판사는 수천만원짜리 외제차를 공짜로 받으며, 의경의 꽃보직은 청와대 민정수석 아들의 몫이 되는 현실에서는. 픽션의 세계에서 극단적으로 그려지는 기득권의 위력이 종종 논픽션으로 목격되는 곳에서, 공정한 세상은 환상이나 희망일 뿐이라고 치부된다.

그런데 그 판타지를 현실에서 발견했다. 리우올림픽에서 찬란히 빛난 한국 양궁이다. 1988년부터 무려 28년이나 8차례 금메달을 쥔 여자 양궁 단체의 어마어마한 역사, 전종목 4개 금메달을 싹쓸이한 그 진기록의 토대가 바로 오직 실력만 통하는 투명한 룰의 세계였다. 6개월간 10차례 선발전에 걸쳐 4,000발의 화살을 쏘고 각종 대회 기록을 합산하는 고난도의 국가대표 선발과정에는 외압이나 짬짜미라고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때로 부진을 겪는 선수를 교체해야 한다는 유혹이 있었지만 대한양궁협회는 한번 예외를 두면 원칙이 깨질 것이라는 우려에 흔들리지 않았다. 이렇듯 확고한 실력중심주의는 경쟁하고 발전하는 건강한 양궁 생태계를 조성했고, 늘 새로운 메달리스트를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연아, 박태환처럼 걸출한 스타에 의존해 좋은 성과를 내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하지만 스타중심주의는 스타가 사라지면 그 뿐, 지속 가능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쇼트트랙이나 태권도 등 국가대표 선발과정에서 비리가 드러난 종목들이 한때의 영광을 얼마나 쉽게 물거품으로 만들었는지를 떠올려보라.

이런 세상이 곳곳에 있다면 어떨까. 기업의 오너가 자신의 마음에 들고 지시에 복종하는 직원이 아니라 창의적 아이디어와 좋은 실적을 내는 직원을 중용한다면 이 기업은 지속적으로 성장할 것이다. 정당이 제각각 계파 유지에 연연하지 않고 국민에 봉사하고 지지받는 이들을 적극 발굴ㆍ공천한다면 이 정당은 보다 세를 넓혀 국회 의석 다수를 점유할 것이다. 인사청탁이 아니라 경영능력에 따라서 제대로 된 최고경영자를 임명했다면 분식회계로 부실을 숨긴 기업을 살리느라 국민들이 수조원 혈세를 낼 일은 애초에 없었을 것이다. ‘금수저’니 ‘헬조선’이니 운운하며 자기비하에 빠질 일도 당연히 없다.

공정한 시스템이 ‘내 사람만 챙기겠다’는 수많은 이기심을 견제할 수 있다면 대신 전체 사회 구성원이 균형있게 득을 보게 된다. 금메달 걸고 귀국한 한국 양궁 대표팀을 보면서 이런 생각에 가슴이 뛴다면 아직도 무더위에 지쳐 한여름 밤의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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