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베이징 올림픽 유도 60kg급 결승에서 최민호 선수는 오스트리아의 루드비히 파이셔를 한판승으로 누르고 금메달을 땄다. 최선수는 승부가 결정되고 나서 처량할 정도로 울었다. 경기장 바닥에 얼굴을 묻고 오열했다. 파이셔 선수는 최민호가 너무 울어대니까 다가와서 일으키고 안아줬다. 그리고 최선수의 손을 번쩍 들어올렸다. 2등이 1등을 위로하는 기묘한 모습이었다. 나는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최민호가 흘렸을 땀과 눈물을 부인하지 않는다.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인생 최대의 목적을 달성한 선수의 감격을 폄하하지 않는다. 다만 그 모습이 마치 우리의 한계 같아서 안쓰러웠다.
올림픽 금메달은 국민들에게 기쁨이요, 국가엔 영광이다. 이 때문에 나라에서는 세금으로 메달리스트에게 연금을 주고 병역 혜택도 준다. 여기까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자. 올림픽 금메달이 우리에게 그렇게 소중한가. 메달리스트에게는 일생을 걸 만큼 중요한 일이겠지만 국민 개개인의 삶은 올림픽 메달 색깔과는 무관하다. 국가가 운동 이외의 즐거움을 국민에게 주지 못할 때, 국민은 반대로 운동에서만 즐거움을 찾으려 한다. 전두환 정권이 들어섰을 때 프로야구를 비롯해서 온갖 스포츠를 부흥시킨 이유도 그것 말고는 정부가 대중에게 달리 줄 게 없었기 때문이다.
스포츠의 존재 이유는 경쟁이 아니라 참여에 있다. 경쟁은 필수고 대결에서 이겨 1등이 되면 좋다. 하지만 ‘1등만’ 목표로 삼았을 때 우리의 삶은 비루해진다. 공자는 ‘아는 자는 좋아하는 자만 못하고 좋아하는 자는 즐기는 자만 못하다’고 했다. 좋아하고 즐기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철학자들의 판단에 맡기겠다. ‘열국지’에 보면 관중이 산융을 정벌할 때 험한 산을 오르내리는 군사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이틀 거리를 하루에 가게 만든다. 제환공이 노래로 사람의 힘을 모을 수 있는 까닭을 묻자 관중이 답한다.
“대저 사람은 육체가 힘들면 정신도 피곤해지고, 정신이 즐거우면 육체의 피로도 잊게 됩니다.”
즐기는 사람이 마지막 승자가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육체의 피로를 잊기 때문이다. 공부든 운동이든 정신과 육체가 동시에 소모되는 일이기에 즐길 줄 아는 사람을 그렇지 못한 사람이 당할 수 없다. 2002년 월드컵에서 고된 훈련을 모두 마치고 폴란드와 첫 경기를 갖기 전, 히딩크 감독은 선수들에게 이렇게 주문했다. “경기를 즐겨라(Enjoy the game!)”
공자가 주장했던 지고의 가치는 인(仁)이었는데, 즐기는 자는 오롯이 이 경지에 이른다. 인의 반대는 불인(不仁)인데 정이천은 “불인은 마비다”라고 했다. 거꾸로 해석하면 인한 사람은 마비되지 않은 사람이다. 아름다움에 대해서,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게임의 즐거움에 대해서 온 감각을 열고 느끼는 사람이다. 오직 1등만 목적으로 하지 않고 경기 자체를 즐길 때, 여유가 생긴다. 이 여유는 상대의 고통까지 볼 수 있게 한다. 내가 얻는 승리의 기쁨뿐 아니라 내게 진 상대의 아픔까지 어루만지게 한다.
히딩크 감독은 경기를 온전히 즐기려는 마인드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전에서 승리하고 나서 망연자실해 있는 스페인 선수들을 위로했다. 축구 경기가 끝나고 선수들은 상대팀과 땀내나는 운동복을 교환해 입는데, 이는 우정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진 팀에 대한 위로이면서 이긴 팀에 대한 존경의 상징이기도 하다. 위로는 가진 자가 못 가진 자에게, 승자가 패자에게, 덕이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다. 씨름 선수 이만기 인생의 최대 오점은 국회의원 출마 패배가 아니라 어린 강호동에게 지고 나서 강 선수가 내민 위로의 손길을 뿌리친 데 있다. 이기고 지는 것은 인생이라는 전쟁터에서 늘 있는 일. 우리 삶의 금메달은 승리의 순간 너머에 있다. 그저 즐기자.
명로진 인디라이터 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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