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8월 16일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무역선 스페르웨르(Sperwer)호가 1652년 여름 제주도 부근에서 폭풍을 만났다. 배가 파손됐고, 선원 64명 중 36명이 살아 8월 16일 배와 함께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사계리 해안에 표류했다. 그들 중 22세 선원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1630~ 1692)이 있었다.
16세기 네덜란드는 유럽의 최강국이자 세계 제일의 무역국이었다. 아프리카와 동남아시아, 오세아니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누비며 식민지 경영에 박차를 가하던 때였다. 당시의 무역선은 상황에 따라 군선이 되기도 했고, 선원들 역시 군인이기도 했을 것이고, 에도에 난학(蘭學)을 전할 학자나 선교사도 있었을 것이다. 배에는 조선왕조실록이 기록한 목향과 녹비 등 시가 30만 냥어치의 물품 외에도 지식과 무기가 실려 있었을 것이다.
제주 목사 앞에서, 25년 전(1627년) 먼저 표류해 온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Jan Jansz Weltevre, 조선명 박연)의 통역으로 국적과 표류 경위 등 조사를 받은 그들은 이듬해 한양으로 호송됐고, 훈련도감에서 무관으로 벼슬을 살던 벨테브레이의 수하에 배속돼 화포와 조총 등 무기 개량 작업에 투입됐다.
효종 5년, 은밀히 북벌을 추진하던 조선으로서는 대놓고 서양의 군사 문물을 수입할 수 없었고 훈련도감의 무기개량사업 사업 역시 외교적으로 민감한 기밀이었다. 그러니 1655년 3월 하멜 일행 중 2명이 청나라 사신단의 행로를 막고 자신들의 신분을 밝히며 도움을 청한 사건은 조선 왕실로서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사건이었을 것이다. 조정은 그들을 전남 강진과 전라 좌수영의 병영으로 분산 수용했다. 1666년 9월 하멜 등 8명은 일본 큐슈로 탈출했다. 네덜란드로 귀국한 하멜은 1668년 ‘하멜 표류기’를 써서 서양 사회에 조선을 알렸다.
조선이 그들을 통해 서양의 지식과 문화를 체계적으로 파악하려 한 것 같지는 않다. 효종 실록과 일부 실학자의 문집에 그들에 대한 이야기가 에피소드처럼 담겨 있다. 실학자 이덕무의 ‘청장관전서’에는 ‘아란타(네덜란드) 사람’들의 외모 묘사와 함께 “항상 한쪽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누는 것이 마치 개와 같다”는 내용이 나온다고 한다. 그러지 않는다는 걸 조선이 알게 된 건 200여 년(개항 1876년)이 지나서였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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