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편 어려운 독거 어르신 위해
식사대접ㆍ안전도우미 역할
“부친 독립유공자 등록”이 꿈
“나를 내세우려 하기보단 네가 나보다 더 사회에 필요한 사람이 되거라.”
일제강점기 항일운동을 펼친 아버지의 이 같은 뜻을 따라 팔순이 넘은 몸으로 수년째 어려운 이웃들에게 식사대접을 하고 있는 김성식(82)씨. 서울 중구 방산시장에서 40년째 한식집을 운영 중인 김씨는 2009년 10월부터 6년 넘게 매달 마지막 수요일마다 혼자 지내거나 생활이 어려운 어르신들에게 식사 대접을 하고 있다. 김씨는 또 식사대접과 별도로 매일 아침 출근ㆍ등굣길에 방산시장 횡단보도에서 안전도우미 봉사활동을 10년째 펼치고 있다.
김씨의 부친은 일제강점기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백범 김구 선생과 항일운동을 함께한 김정로(1914∼1958) 선생이다. 호적상 이름은 ‘김정규’지만 김구 선생이 나라를 바르게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로 ‘바를 정(正)’에 ‘노나라 노(魯)’자를 붙여 새로운 이름을 선물했다.
전북 순창 출신으로 광주고등보통학교 재학 중이던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가한 김 선생은 백범 김구가 있던 중국 상해임시정부와 독립운동 중심지인 북간도 용정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특히 1935년 전북 전주에 독립운동 거점으로 ‘건지사’라는 절을 세우기도 했다. 이후 김 선생은 1943년 밀고로 체포돼 옥고를 치르다 해방과 함께 풀려났다.
“아버지는 일제 눈을 피해 독립운동을 하느라 집에 들어올 겨를이 없었어. 파란 죄수복을 입고 파란 천이 눈까지 덮었던 아버지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해.”
김씨는 7살이 돼서야 감옥에서 아버지인 김 선생을 처음 만났다. 해방 후에도 거의 매일 김구 선생을 만나며 조국 재건에 힘쓴 아버지는 2대 국회의원으로 선출돼 정치에 진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옥고 후유증 탓에 1959년 마흔넷의 나이로 일찍 세상을 떴다.
24살에 아버지를 여읜 후 생계전선에 뛰어든 아들은 그간 독립운동에 나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며 봉사활동을 이어왔다고 자부한다. 이제 아들의 마지막 소원은 아버지를 독립유공자로 등록하는 일이다. 김씨는 “‘내 이름을 팔아 잘 되려고 하지 말라’던 아버지 말씀에 유공자 등록신청을 미뤄왔지만, 내 나이를 보니 이제는 아버지의 활동을 세상에 알릴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아버지의 유품과 관련 기록을 모아 이르면 내년에 유공자 등록을 신청할 계획이다.
이태무 기자 abcdefg@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