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과 똑같이 겪는 여름인데 남보다 더 덥게 느껴진다. 작년까지 나를 찾지 않던 모기가 나만 골라서 문다. 겨우 잠이 들었다가 두 시간을 못 자고 깨기 일쑤다. 하루에도 몇 번씩 등줄기에 화끈한 열이 지나가고 얼굴에 열꽃이 피기도 한다. 아 이런 거로구나! 말로만 듣던 갱년기 증상이 내게도 찾아왔다. 그것도 전국에 폭염특보가 내려지고 열대야가 스무 날 넘게 이어지고 있는 한여름에….
우리집 큰 아이는 식구 중에 제일 말랐는데 지방을 품고 사는 엄마보다 훨씬 더 더워한다. 끝이 보이지 않는 구직활동 대신 창업을 해보겠다고 집에 들어 앉았다. 컴퓨터 2대와 모니터 2개를 열어 놓고 하루 종일 뭔가를 한다. 미세먼지 때문에 창문은 절대 열지 않는다. 뉴스에 나오는 우리나라의 미세먼지 농도가 외국 사이트에서 발표하는 농도보다 항상 낮다는 증거를 들어 ‘미세먼지 보통’이라는 대기오염정보를 믿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의 방 기온은 집 안의 다른 곳보다 3도쯤 높다. 아이는 창업의 일꾼답게 새벽까지 일하다가 집에서 유일한 에어컨이 있는 거실에 나와서 잔다, 물론 에어컨을 켜고.
갱년기 엄마는 후끈한 내 안의 열기보다 전기요금 고지서가 무서워 일어나자마자 서둘러 에어컨을 끈다. 컴퓨터 서버 하나 더 켰을 뿐인데 3만원이 더 나왔던 몇 달 전의 고지서를 기억하는 탓이다. 겨우 달걀프라이를 하나 하는데 이마에 땀이 송글 맺힌다. 국을 끓이려면 에어컨을 켤 수 밖에 없다고 스스로 변명하며 에어컨의 전원단추를 누른다. 국에 넣을 파를 썰며 다시 전기요금 고지서를 걱정한다.
한 달 넘게 마음 속에 ‘전기요금폭탄’이라는 걱정을 안고 살다가 전기요금 누진제를 한시적으로 완화해 요금 부담을 낮춘다는 속보를 들었다. 마음 놓고 하나뿐인 에어컨을 틀어도 되겠다고 기뻐했다. 처음으로 그 분이 가진 제왕적 지시의 힘에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 오전까지도 ‘전력수급 안정과 전력 다소비 가구 감세 논란’ 때문에 누진제 완화는 어렵다던 산업통상자원부가 아니던가! 발표가 난 저녁엔 안심하고 밤새 에어컨을 켰다.
그런데 아침에 깨어 뉴스를 보니 폭탄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 하루에 8시간 에어컨을 틀었다면 종전요금은 37만원, 이번 조치로 줄어든 요금은 34만원이란다. 하루에 한 시간쯤 에어컨을 더 틀 수 있는 정도의 할인이란다. 우리집은 24시간 내내 덥다. 무럭무럭 늙어가는 엄마와 미래가 불투명한 아들은 24시간이 240년처럼 더 덥다.
폭탄보다 더 기막힌 뉴스도 있다. 작년 영업 이익 11조원을 넘긴 한전은 주주들에게 1조 9,000억원의 배당금을, 임직원들에게는 3,600억원의 성과급을 지급했다. 정부의 누진제 완화에 사용되는 비용 4,200억원을 훨씬 넘는 액수다. 한전이 진 107조원의 빚은 아직 갚지 않았단다.
갱년기 아줌마가 바보라서, 폭탄요금고지서대로 조용히 납부하는 건 아니다. 뜻을 펼칠 일자리를 제 힘으로 만들려는 청년이 멍청해서, 죽도록 더운데도 에어컨을 끄자고 사정하는 엄마 말을 듣는 것도 아니다.
남)아무리 더운 날도 아이들은
뛰어 놀아야 합니다.
셰프들은 불 앞에 서야 하죠.
작가가 펜을 놓거나 청춘이
사랑을 멈출 수 있나요?
여)아무리 더운 날도 세상은 움직이고 있습니다.
아무리 더워도 국을 끓이고, 일을 해야 한다. 성과급 못 받는 카피라이터도 알고 있는 세상의 이치다. 마음 놓고 에어컨을 켤 수 있는 나라에 살고 싶다. 저희들 성과급을 줄여서라도 서민들의 전기요금을 줄여주는 정부를 갖고 싶다. 내년 대선 때까지 이 여름의 폭탄고지서를 아줌마들도 청년들도 집에 넉넉한 월급봉투를 가져다 주지 못하는 가장들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허락된 한 표의 힘으로 꼭 복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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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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