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든 중반인 어머니에게 들은 어머니 어릴 적 이야기 중 인상 깊은 한 토막은 어머니가 소학교 다닐 때 몇몇 집안 딸들이 하인들에게 업혀서 학교를 다녔다는 것이다. 일부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당시는 소위 근대화가 이루어진 일제 강점기였던 데에다, 공식적으로 노비제도가 없어진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일제 말기 소학교 풍경은 칼을 찬 일본 선생이 일본어로 신학문을 가르치며 신분과 무관한 체벌을 하는 근대적 규율이 지배하는 곳이며, 동시에 하인들이 학생들을 업어 나르는 기묘한 것이었다. 물론 농민의 자식들은 당연하게 먼 길을 걸어 학교에 다녔고, 그나마 농사 일이 많은 날에는 학교에 가지 못했다. 게다가 고등교육은 농민의 자식들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어린 시절 친구들을 가끔 만나시는 어머니의 전언에 따르면 과거 신분제의 흔적은 현재 노년의 삶에 그다지 큰 자취를 남기지 못한 것 같다. 어린 시절 교육 불평등은 한국 노인들의 보편적인 결핍과 고독에 별다른 차이를 가져오지 못한 채 대체로 과거의 이야깃거리로 남은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전쟁과 급속도의 경제성장, 독재와 민주주의라는 격동이 그 흔적을 폭력적으로 지워놓은 탓이리라. 큰 대가를 치르며 우리 사회 성원들은 동등한 시민으로서 공동체 의사 결정에 모두 지분을 갖는 대중 민주주의를 향해 진전해 왔고, 근래에는 최소한의 기회 평등을 꿈꿨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어렵게 쌓아온 대중 민주주의의 성과가 퇴행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삶의 전 영역에서 계층에 따른 분리가 견고해지고 있으며, 지위 세습의 메커니즘이 작동하기 시작했음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단순히 소득 격차가 벌어지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교육, 주거, 건강 그리고 죽음에 이르는 삶의 전 영역에서 격차가 증폭되고 있다. 보안이 철저한 주거와 계층적 동일성이 유지된 학교, 학원, 병원 등에서 다른 계층의 사람들을 만날 일 없는 ‘분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계층 간 삶의 분리와 지위 세습은 정치적, 사회적 의사 결정에서의 폐쇄성과 정서적 분리를 강화시킨다.
특히 교육은 지위 세습과 계층 분리의 핵심 고리다. 영국의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는 분업으로 인한 노동력의 질 저하를 보완하는 대안으로서 최소한의 대중교육을 주장했다. 이런 신념에 따르면 대중교육은 그야말로 최소 수준이라는 목표를 가진다. 또한 보수주의자들이 대중민주주의를 혐오하고 엘리트주의를 정당화하는 근거 중 하나는 차별화된 교육을 받은 자가 사회를 이끌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교육은 우리 사회에서 상층의 ‘격차 벌리기’ 전략과 이를 따라가려는 중간층 사이의 묘한 경주가 벌어져 온 영역이다. 보편적인 대중교육이 자리잡아 진학 자체에는 격차가 줄었으나 질적 차별화 전략이 치열하게 구사된다. 그 조밀한 틈을 비집고 신분이동을 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이다. 여러 연구들은 부모의 직업, 재력과 자녀의 학력, 직업이 갖는 상당한 상관성을 보여준다. 이런 구조가 고착될수록 개인은 더 많은 삶의 제약과 기회 상실을 겪게 된다. 이것은 마치 새로운 신분제의 출현처럼 보이기도 한다. 차별화된 교육이 위력을 발휘하고 계층간 삶의 분리가 고착된다면 대중민주주의의 성과는 무화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회의 분리는 상당 부분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국가의 제어 실패에 기인한다. 정부가 사회통합과 복지를 말로만 내세운 채 갔다 섰다를 반복하며, 단순히 돈 문제로 치환하는 것은 지금 국가의 실패를 극복하는 대안이 아니다. 계층 분리가 이루어지는 사회에서 평등의 제고 없이 사회통합이 어떻게 가능할까.
‘우리가 바라는 사회의 모습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내놓을 때다. 자본주의 성숙이 새로운 계급질서의 공고화를 의미한다면, 더욱 평등한 사회에 대한 열정과 이것이 사회의 퇴행과 기회 불평등의 심화를 가져오지 않도록 막는 국가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교육, 의료, 주거, 노후보장에서 담장을 허물기 위한 더 많은 공적 투여가 이루어질 때이다.
주은선 경기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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