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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 칼럼] 여름에 생각하는 중세의 겨울

입력
2016.08.14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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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의 역사가 요한 호이징가에 따르면, 중세가 암흑기만은 아니다. 중세의 가을은 한 시대의 쇠퇴를 뜻하기도 하지만 새 시대의 수확을 준비하는 풍요로운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청소년기 우남(雩南) 이승만이 겪은 것은 중세의 가을이 아니라 중세의 겨울이었다.

우남은 13살이 되던 1887년 과거시험에 응시한다. 관련 사료에 따르면 당시 응시생은 15만 8,578명이었고 그 중 5명이 합격했다. 당시 정부는 시험장에 모여든 이들을 일일이 세어보고 신원확인을 거쳐 시험을 공정하게 집행했을까. 만약 해당 사료가 허구라면 기록을 중시했다는 조선은 왜 그런 국가기록을 남겼을까. 그 무엇보다 3만대 1이 넘는 경쟁률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당시 인구 통계가 필요하다. 조선의 호구조사는 목전의 조세징수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당시 인구를 엄밀하게 알 수 있는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인구학자들은 식민지 시기 통계를 활용하여 19세기 말의 인구를 1,700만명 정도로 추정하곤 한다. 그러면 1,700만명 중에 과거시험을 치를 만한 문해력을 가진 사람들은 어느 정도였을까. 조선시대 문자 해독률에 대한 통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 참고로 2001년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문자 해독률은 높지만 문서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하위다. 내용은 잘 모르고 글자만 아는 사람이 성인의 38%에 달하는 데 비해 고급지식노동을 할 수 있는 성인은 2.4%밖에 되지 않는다.

20세기 내내 정부는 문해력 증진에 매진해 왔으므로 조선시대의 문해력보다 현대 한국의 문해력이 높다고 가정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당시 과거시험에서 필요한 것은 한글 문해력이 아니라 난해한 한문 문해력과 문장력이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당시 과거시험을 제대로 치를 만한 독해력과 문장력의 소유자는 당시 인구의 2.4%보다 훨씬 적지 않았을까. 통계상의 추정을 보완하기에 위해 이에 관련된 조선 후기 지식인의 언명을 살펴보자. 유수원(柳壽垣)은 우남이 과거시험을 치기 약 150년 전쯤 이렇게 말했다. “명색이 유생(儒生)이면서도 고전과 역사서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백에 하나뿐이고, 글의 맥락을 논할라치면 몽매한 사람들이 넘쳐난다. 그런데도 단지 추리고, 표절하는 기술만 익혀 과거시험장에 출입하며 요행만을 바란다.”

16만명에 육박하도록 늘어난 과거시험 응시자 수는 유수원이 개탄했던 경향이 꾸준히 악화된 결과는 아닐까. 우남과 함께 응시했던 15만 8,500여명의 사람들 중에 고전과 역사서를 읽을 줄 알고, 맥락맹이 아니었던 이의 수는 어느 정도 될까. 왜 그 많은 사람들은 글의 맥락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면서 시험장에 몰려와 3만대 1의 요행을 바랐을까. 요행을 바라는 그 인파에게, 시험관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성인이 되는 방법이나 그러한 성인이 행할 만한 통치술에 대해 문제를 내곤 했다. 아무도 다음과 같은 과거시험문제는 출제하지 않았다. “출세해보려고 국가고시를 쳤는데 경쟁률이 3만대 1이었을 때의 절망감에 대해 서술하시오”라든가 “경쟁율이 3만대 1이 넘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험을 치러야 했던 고시생이 느꼈을 부조리함에 대해 논하시오.”

우남은 1894년 갑오경장을 통해 과거시험이 폐지될 때까지 집요하게 거듭 도전한다. 그리고 끝내 불합격한다. 그는 이제 한문 대신 영어를 열렬히 익힌다. 그리고 나라를 위해 중요한 것은 도덕적으로 완벽한 성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계몽된 이기심을 배양한 시민이 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미국유학을 통해 학위를 취득하고, 영어 통역사자격을 지닌 비엔나 출신의 여성 프란체스카 도너와 결혼한다. 미 군정과 영어로 소통이 가능했던 우남은, 1948년 광복절을 맞아 마침내 조선이 아닌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하게 된다. 그 뒤 약 12년이 지나 우남은 자신이 말했던 그 시민들에 의해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다. 그리고 이어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혹한기 극기 훈련으로서의 한국현대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김영민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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