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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같은 귀국했지만…우린 나라 없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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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같은 귀국했지만…우린 나라 없는 사람”

입력
2016.08.1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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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음 떠올리며 버틴 강제징용

아버지ㆍ형 대신해 탄광 끌려가

하루에 콩밥 500g 먹으며 일해

도망치다 잡힌 동료들 주검으로

“당시 후유증에 위 30% 도려내”

2. 무국적자로 지낸 65년 설움

혼인신고도 하지 않고 버텼지만

자녀들 학교 때문에 소련사람 돼

정부는 사망자에만 위로금 지급

“40만원으로 한 달 겨우 버텨$”

사할린 강제징용 피해자 김정호(94ㆍ왼쪽)씨와 김기와(83)씨 부부가 12일 인천 남동구 논현동 집에서 가족 사진을 들고 힘들었던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사할린 강제징용 피해자 김정호(94ㆍ왼쪽)씨와 김기와(83)씨 부부가 12일 인천 남동구 논현동 집에서 가족 사진을 들고 힘들었던 과거를 회상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우리는 임자(나라) 없는 사람이었어.”

12일 인천 남동구 논현동의 임대아파트에서 만난 사할린 강제징용 피해자 김정호(94)씨에게 광복 71년의 의미를 묻자 씁쓸해 하며 던진 첫마디다. 김씨는 한국으로 영주 귀국한 강제징용 피해자 1세대 중 유일한 생존자다. 사할린으로 끌려간 지 65년 만인 지난 2007년 귀국했지만 해마다 찾아 오는 광복절은 해방의 기쁨보다 오랫동안 무국적자로 지내야 했던 설움을 곱씹는 날이다.

65년 만에 고국행 비행기에 올라

김씨의 기억은 스무살이었던 1942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고령인 아버지와 형을 대신해 사할린 탄광으로 끌려 간 게 그 해 3월 1일. 4월까지 눈이 수북이 쌓인 샤흐초르스크 탄광에서 하루 15시간씩 갱도를 팠다. 김씨는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 온 종일 캄캄한 막장에서 죽음을 떠올리며 사투를 벌였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일본인들은 ‘배가 나오면 갱도에 들어갈 수 없다’며 하루에 메주콩밥 500g만 지급했다. 탈출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도망치다 붙잡힌 동료들은 악명 높은 ‘다코베야’ 수용소에 갇혀 있다 주검이 돼서야 세상으로 나왔다. 당시 후유증으로 김씨 역시 위를 3분의 1이나 들어냈다.

광복의 설렘도 잠시. 고향인 울산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은 금세 산산조각 났다. 일본 패망과 함께 당도한 귀향선은 일본인만 태웠다. 49년 7월 마지막 귀향선이 출항한 뒤 남은 한국인 강제징용자 4만3,000여명은 그렇게 65년 동안 임자 없는 사람으로 살았다.

기약 없는 타향살이가 이어지면서 김씨는 51년 결혼해 3남1녀를 뒀다. 무국적 신분이라 혼인 신고도 하지 못했다. 김씨는 “‘공산국가인 소련 국적을 따면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 있다’는 생각에 계속 버텼다”고 했다. 하지만 굳은 결심은 자녀들이 학교에 갈 나이가 되자 무너졌다. 어쩔 수 없이 소련사람이 됐다.

벌목일과 협동농장 건축공으로 어렵게 지낸 김씨는 2007년에야 꿈에 그리던 고향 땅을 밟았다. 1990년 한국이 소련과 국교를 맺고 사할린 징용 피해자 영주귀국 사업이 시작되면서 기회가 열렸다. 현지에 정착한 자식들이 눈에 밟혀 망설였으나 “영주귀국 사업이 끝날 것 같다. 서둘러야 한다”는 주변 권유에 못 이겨 부인과 한국행을 택했다.

긴 시간을 돌아왔지만 고국에서의 삶도 순탄치 않았다. 정부는 1990년 9월30일 이전 사망한 피해자 가족에게만 피해 위로금을 지급했을 뿐, 생존자는 아예 보상 대상에서 제외했다. 현재 김씨가 받는 돈은 기초생활급여와 정부지원금을 합쳐 80만원이 고작이다. 아파트 월세와 병원비를 내고 나면 40만원이 채 안 되는 돈으로 부부는 한 달을 버틴다. 형편이 넉넉지 않은 큰 아들은 올해 5월 9년 만에 처음으로 부모를 찾았다. 부인 김기와(83)씨는 “2년 전 사위가 병으로 죽었는데도 딸의 손조차 잡아주지 못한 게 한이 된다”고 울먹였다.

생이별 아픔 겪는 강제징용 피해 가족들

고단한 노년을 보내는 사할린 강제징용 피해자는 김씨 만이 아니다. 이 곳에 거주하는 영주귀국자는 447명. 지금까지 한국에 온 강제징용 피해자 가족 4,376명 중 10%가 넘는 규모로 대부분 2세대들이다. 이들 역시 사할린에 두고 온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이 가장 크다. 2007년 영주귀국한 최화자(72ㆍ여)씨는 “자식들과 이별 아닌 이별의 삶을 살고 있다”며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던 부모님의 유언이 아니었다면 한국을 찾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징용 피해자들이 다시 가족과 생이별하게 된 건 한일 정부의 무관심 때문이다. 일본 정부는 사할린 강제징용 피해자의 영주귀국 비용을 지원하면서 대상을 해방 이전 출생자로 제한해 해방 이후 사할린에서 태어난 3세대는 계속 현지에 머물러야 했다. 김씨 같은 1세대 피해자들이 겪은 이별의 고통을 자식 세대가 그대로 물려받은 셈인데도 한국 정부는 팔짱만 끼고 봤다. 두 살 때 부모를 따라 사할린에 갔다 영주귀국한 김민자(74ㆍ여)씨는 “지금은 통신수단이 발달해 그리움을 어느 정도 달랠 수 있지만 죽은 뒤 자식들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려고 화장(火葬)을 부탁해 놨다”고 말했다.

같은 피를 나눈 이웃의 외면과 냉대도 이들을 힘들게 한다. 영주귀국자 김동태(80)씨는 “한국 동료를 사귀고 싶어 아파트 경로당에 가도 자신들만 사용하는 장소라며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징용 피해자 가족들은 임대아파트의 좁은 울타리 안에서 러시아말로 소통하며 그들끼리 삶을 이어가고 있다.

피해자 가족을 지원하는 활동가들은 이방인처럼 외롭게 살아가는 사할린 영주귀국자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부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최상구 지구촌동포연대 사무국장은 “사할린에 남은 자녀세대에 대한 지원을 골자로 한 ‘사할린동포 특별법’이 여러 차례 거론됐지만 사회적 무관심 속에 실현되지 못했다”며 “자국민의 강제징용을 막지 못한 정부의 책임을 다하는 게 징용 피해자와 후손에 대한 마지막 배려”라고 강조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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