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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끝뉴스] 언론의 미개한 '성' 관련 보도

입력
2016.08.12 1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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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섹스를 한 게 아닌데, 폭행을 당하다가 죽을 뻔 한 건데….”

3년 전쯤 우연한 기회에 성폭행 피해자 A씨를 만났습니다. 당시 A씨는 과거 자신의 피해사례가 언론에 보도됐던 경험을 털어놓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떤 기사 내용 중에 ‘성관계를 했다’란 표현을 봐 버렸어요. 마우스를 잡고 있던 손이 부들부들 떨리더라고요.”

언론에 의한 2차 피해를 털어놓던 A씨 앞에서 일순간 할말을 잃었습니다. 범죄 피해자인 A씨를 그야말로 두 번 죽인 일부 매체의 무식과 미개함으로부터 완벽히 자유로울 수 있는지 자문하며 그렇게 A씨와 헤어졌습니다.

시간이 꽤나 흐른 지금까지 A씨가 당시 했던 말이 토시 하나 빼놓지 않고 뇌리에서 떠나지 않는 건 유난히 덤덤했던 그의 목소리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갑자기 3년 전 기억을 끄집어낸 건 최근 ‘현직 부장판사의 성매매 사건’을 다루는 일부 매체의 폭력에 가까운 보도행태를 또 다시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폭력과 성매매는 엄연히 다른 종류의 범죄입니다. 하지만 위력 혹은 자본력을 무기로 인간의 존엄성을 심각하게 해친다는 이유로 모두 국가가 법으로 금지한 범죄행위란 공통점이 있습니다(물론 올해 초 헌법재판소가 합헌 결정을 내린 성매매특별법의 경우 보다 다양한 층위의 이해관계와 가치관이 복잡하게 얽혀 법 자체가 늘 논란의 대상이긴 합니다).

또 하나, 두 범죄 모두 보도의 가장 큰 목적인 범죄 예방은 온데간데 없고 흥미를 자극하는 선정적인 보도가 주를 이룬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습니다.

지난 4일 종합편성채널 TV조선이 방송한 ‘박종진 라이브쇼’가 대표적입니다.

부장판사의 성매매 적발 소식을 다루던 사회자는 대뜸 패널로 출연한 한 심리학자에게 “성매매 하셨죠?”란 질문을 던집니다. 당황한 심리학자를 향해 사회자는 폭언에 가까운 질문을 멈추지 않습니다. "성매매특별법 이전에는 그 뭡니까. 많이 있었지 않습니까? 집창촌도. 가보셨죠?”

지난 4일 TV조선 ‘박종진 라이브쇼’ 진행자가 패널에게 성매매 경험을 묻는 내용이 방송돼 논란을 빚자 이 프로그램은 다시보기 서비스에선 해당 대목을 삭제했다. TV조선 방송화면 캡처
지난 4일 TV조선 ‘박종진 라이브쇼’ 진행자가 패널에게 성매매 경험을 묻는 내용이 방송돼 논란을 빚자 이 프로그램은 다시보기 서비스에선 해당 대목을 삭제했다. TV조선 방송화면 캡처

“구경 갔다”는, 역시나 한숨 밖에 나오지 않는 심리학자의 답변에 사회자는 “네, 가봤다는 것만 인정하겠습니다”라며 말장난에 가까운 진행을 이어갔습니다.

‘오원춘(우웬춘) 같은 극악 성 범죄자들이 늘고 있다’ ‘대학생 아들을 둔 어머니들이 이 법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등을 이유로 들며 시종일관 성매매를 합법화시켜야 한다는 비논리로 범벅이 된 진행은 굳이 더 이상 설명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11일 민주언론시민연합이 지적했듯 “사안의 본질과 무관한 성매매 경험을 집요하게 묻는 등 흥미위주 진행으로 일관한” 이날 방송은 언론이 성매매를 엄중한 범죄가 아닌 가십거리 정도로 여기고 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단적인 사례입니다.

주요 일간지와 방송사가 자사의 기사를 페이스북 페이지에 소개하며 붙인 코멘트도 최근 논란이 됐습니다. 국내 일간지 중 가장 많은 페이스북 구독자 수를 지닌 조선일보는 얼마 전 성폭행 논란에 휘말렸던 배우 겸 가수 박유천의 기사를 소개하며 ‘화장실을 몇 시간을 쓰는 거야 대체’ 등의 기사 소개 글로 논란을 빚더니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성매매 의혹을 다룬 기사에선 ‘갤럭시4 저는 X됐습니다’ 같은 부적절한 표현을 쓰며 비판을 받았습니다.

부장판사 성매매 사건을 소개한 주요 언론사의 페이스북 페이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불필요한 성적 상상을 불러 일으키는 침대방 사진을 소개 사진으로 내걸어 ‘술을 마시고 성매매 홍보전단을 보고 연락해 오피스텔로 갔다’는 설명을 늘어놓은 페이지는 오히려 점잖아 보일 정도입니다.

‘판사님? 거기서 뭐하신 거예요?’ ‘판사님, 드랍더… 아, 아닙니다’ ‘판사님 딱 걸렸네’ 등 장난스러운 표현으로 이 사건을 소개하기 바쁜 언론사의 모습은 ‘미개하다’란 표현으로 밖엔 설명이 불가능했습니다.

여성학을 공부하며 관련 단체에서 일하는 한 활동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런 수준 이하의 보도를 볼 때마다 제 인생에 회의가 들어요. 거금 들여 공부하고 성범죄와 여성의 성을 둘러싼 잘못된 사회적 통념을 바로 잡기 위해 매번 싸우면 뭐해요. 이걸 전하는 언론이 이 모양인데.”

언론이 시청률과 클릭 수 앞에 무릎 꿇은 결과는 때로 한 여성학자가 자신의 인생에 회의감을 느끼게까지 합니다. 자신의 무식과 무지가 소중한 전파와 지면, 온라인 공간을 오염시킬 수도 있다는 사실을 언론인 스스로 늘 곱씹었으면 합니다.

조아름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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