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 초반 권투와 야구광으로 발현한 스포츠 마니아 기질이 나이를 먹어도 수그러들지 않는다. 요즘도 매일 저녁 프로야구 중계를 보며 피로를 푼다. 좋아하는 선수 이름과 번호가 박힌 셔츠를 입고 직접 관람도 한다. 주말에 골프와 축구중계까지 보려면 엄청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을 기다리는 건 평소 접하기 힘든 종목과 스타들의 경기를 한꺼번에 볼 수 있어서다. 올림픽이 아니라면 펜싱이나 경보, 역도와 마장마술을 어디서 쉬이 감상할까. 좀 더 다양한 종목을 중계해주지 않는 방송사가 야속하지만 달리기와 수영을 챙겨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지덕지다. 도구 없이 맨몸으로 승부를 거는 달리기와 수영을 보노라면, 인간 육체가 만들어내는 최상의 예술을 목도한다는 감동으로 심장이 쿵닥거린다.
명승부가 유난히 많은 달리기 시합 중 내 기억에 제일 강렬하게 남은 경기는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여자 100m 결승전이다. 출발 총성이 울리자 미국의 게일 디버스와 자메이카의 멀린 오티가 매끈한 팔다리를 뻗으며 경주마처럼 튀어나갔다. 3년 전 세계육상대회서 1,000분의 1초 차로 명암이 갈린 라이벌이었다. 수성을 다짐하는 디버스와 올림픽 금메달로 설욕하리라 벼르던 오티의 열망이, 몸의 근육 하나하나에서 뿜어져 나왔다. 10초 94. 전광판에 찍힌 기록은 동일했다. 사진 판독 결과 디버스가 10초 932, 오티가 10초 937이었다. 200분의 1초, 거리로 따지면 1㎝ 차로 다시 디버스의 승리였다. 오티는 이후 2004년 아테네올림픽까지 총 일곱 차례 올림픽에 출전하며 그때 그 1㎝의 아쉬움을 만회하려 했지만 염원하던 금메달을 끝내 얻지 못했다.
수영의 경우 저 유명한 에릭 무삼바니의 역영이 가장 또렷하게 각인된 장면이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의 수영 스타는 단연 ‘인간 어뢰’ 이언 소프였다. 그런데 수영 자유형 100m A조 예선에서 희한한 상황이 연출됐다. 기록이 가장 낮은 선수 세 명이 출발대에 섰는데 전신 수영복이 대세이던 그 시절, 헐렁한 삼각팬티를 입은 5레인 선수의 멀뚱한 표정이 카메라에 잡혔다. 웬걸. 다른 두 선수가 부정출발을 하는 바람에 적도기니 대표로 출전한 청색 삼각팬티 무삼바니 홀로 역영을 펼쳐야만 했다. 그야말로 참가에 의미를 두는 올림픽 정신에 걸맞게 시종일관 머리를 물 위로 내놓은 무삼바니는 전 세계로 송출되는 중계카메라의 화면을 독점하며 50m를 그럭저럭 헤엄쳤다. 가뜩이나 더딘 속도가 확 줄어든 건 반환점을 돈 직후부터다. 팔다리의 움직임도 점점 더 노골적인 개헤엄이 되었다. 다리에 쥐가 났나? 아니었다. 그는 올림픽에 출전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50m 레인에서 수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중계진마저 웃음을 참지 못하는 사이 시드니 아쿠아틱센터를 가득 메운 관중이 하나둘 일어나 무삼바니를 연호하기 시작했다. 압도적 꼴찌를 기록한 무삼바니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불후의 명언을 남겼다. “남들은 메달을 따기 위해 헤엄을 쳤지만 나는 익사하지 않기 위해 죽을힘을 다했다.” 스타 탄생! 지금도 이 경기 영상을 찾아볼 때면 비어져 나오는 눈물과 웃음을 참기 힘들다.
리우올림픽이 반환점을 돈다. 시차 문제에다 초반 한국 선수단의 경기 성적이 신통치 않아서인지 열기가 시들하다. 메달이 뭐 중요하냐고들 하지만, 선수에게나 관중에게나 메달의 향방은 매우 중요한 문제다. 응원하는 우리 선수가 지는 꼴 보고 기분 좋을 리도 만무하다.
마니아들이 올림픽을 즐기는 비법은 하나다. 염천보다 뜨거운 애국심을 아주 살짝만 옆으로 밀어놓을 것. 그럴 때 비로소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지는 스포츠 드라마의 장대한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온다. 올림픽의 꽃인 육상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오래도록 기억될 리우의 명장면은 아마 지금부터 연출될 게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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