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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에겐 메달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었다

입력
2016.08.12 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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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영이 금메달을 딴 뒤 머리 위로 하트를 만들며 환하게 웃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박상영이 금메달을 딴 뒤 머리 위로 하트를 만들며 환하게 웃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남자 펜싱 에페 개인 결승에서 극적인 뒤집기를 보여준 박상영(21ㆍ한국체대)은 인터뷰 솜씨도 ‘금메달감’이었다. 10-14로 지고 있을 때 어떤 전략을 세웠냐고 묻자 그는 “전략이요? 그런 건 없었고 올림픽이 세계인의 축제잖아요. 그냥 즐기고 싶었어요”라고 답했다. “부모님께서 어떤 말씀을 해 주셨느냐”는 질문에는 “아 많은 말씀을 해주셨는데. 제가 바쁘다고 맨날 먼저 끊어서(기억을 다 못한다)”라고 머리를 긁적였다.

“여자 친구가 있느냐”는 물음에 대한 마지막 답변도 압권이었다. “있는데 오기 전에 싸웠어요.” 그의 이 말 한마디에 믹스트존(공동취재구역)은 웃음바다가 됐다. 박상영도 웃고 기자들도 웃었다. 현장 기자들 사이에서 두고 두고 회자된 인터뷰였다.

기자는 2010년 남아공월드컵, 2012년 런던올림픽,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 2011년 호주에서 열린 아시안컵 축구대회 등 수많은 국제 무대에 가봤다. 우리나라 선수들? 솔직히 인터뷰 ‘못’ 한다. 물론 개인적인 의견이다. 모든 선수를 지칭하는 건 아니니 오해 말기를. 하지만 대체적으로 그렇다.

이해도 된다. 수많은 카메라와 취재진 앞에서 똑 부러지게 말하는 게 쉬운 건 아니다. 또 우리나라는 ‘겸손이 미덕’이라는 정서도 있다. 스포츠의 속성상 승자가 있으면 패자가 있기 마련인데 표정관리 안 하면 ‘건방지다’고 오해 받는다. ‘누워서 침 뱉기’긴 하지만 언론 탓도 있다. 지금은 은퇴한 A선수가 유럽 프로축구 리그에서 뛸 때 에피소드다. 극적인 골을 넣은 뒤 한국에 있는 기자와 전화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인터뷰를 잘 마치고 말미에 기자가 “지금까지 고생 많이 했으니 이제 돈도 좀 벌어야죠”라고 농담처럼 묻길래 “돈이요? 저도 많이 벌고 싶죠”라고 답했더니 다음 날 대문짝만하게 ‘A, 이제는 돈 벌고 싶다’는 제목이 나왔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선수들은 듣기 좋은 말만 골라 하게 된다.

그래서 박상영의 인터뷰는 참 신선했다. 하지만 좀 더 돌아보니 솔직, 발랄, 엉뚱한 ‘톡톡 튀는’ 인터뷰이가 적지 않았다.

여자 유도의 정보경이 은메달과 상패를 들며 활짝 웃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여자 유도의 정보경이 은메달과 상패를 들며 활짝 웃고 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여자 유도 48kg에서 은메달을 딴 정보경(25ㆍ안산시청)은 결승에서 패한 날 눈물을 쏟아 심금을 울리더니 다음 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중학교 때 친구들이 다 비슷한 장래희망을 품길래 특별한 꿈을 가지고 싶다는 마음에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은메달이 (대통령이 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나”라고 말해 웃음을 자아냈다. 이어 “실업팀에 입단하고 ‘직업인’이 되면서 꿈이 조금 바뀌었다. 열심히 돈을 벌어서 건물주가 되는 것이 목표이자 꿈이다”고 덧붙여 취재진이 뒤집어졌다. 양궁 남자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딴 뒤 “아름다운 밤이에요”라고 했던 구본찬(23ㆍ현대제철)은 다음 날 “오늘 눈뜨고 가장 먼저 금메달이 어디 있나 찾았다. 꿈을 꾼것 같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그가 얼마나 금메달을 따고 싶어 했는지 가슴으로 전해졌다. 여자 양궁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뒤 “금메달 맛이 무지갯빛 솜사탕 맛이다”라고 했던 장혜진(29ㆍLH양궁단)은 개인전에서 우승해 2관왕이 된 뒤에도 재기 발랄했다. 이번 금메달은 무슨 맛이냐고 묻자 초코파이 이야기를 꺼냈다. “여기 와서 진짜 많이 먹었어요. 하루 한 개 이상씩, 지금까지 한 박스는 먹은 것 같아요.” 어떤 기자가 “(초코파이) 광고 찍으려는 거 아니냐”하자 들켰다는 듯 ‘와하하하’ 호탕하게 웃었다. 남자 펜싱 사브르 개인전에서 동메달을 딴 뒤 “친구들은 결혼해서 알콩달콩 살아가는데 저는 진전이 없네요. 올림픽 준비하듯 연애도 해 볼래요”라고 한 김정환(33ㆍ국민체육진흥공단)의 인터뷰도 기억에 남는다.

기자가 되기 전 1990년대 말쯤 일이다.

한일전 축구를 앞두고 방송사에서 한국 최고 스타 B와 일본 축구영웅 나카타 히데토시(39)를 번갈아 인터뷰 했다. 각오를 묻자 B는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반드시 승리하겠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반면 나카타는 “한일전도 축구의 한 경기일 뿐이다”고 했다. B에게 미안하지만 나카타 인터뷰가 훨씬 멋있었다.

우리는 너무 경쟁의 연장선상에서 스포츠를 바라보는 경향이 짙다. 스포츠 기사에 ‘전쟁’ ‘피비린내’ ‘혈투’같은 단어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전차군단’ ‘홍명보사단’같은 용어도 흔히 쓴다. 리우에서 만난 선수들은 승리와 메달 말고도 더 중요한 가치가 많다는 사실을 인터뷰로 보여줬다.

사격 1인자 진종오는 인터뷰도 수준급이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사격 1인자 진종오는 인터뷰도 수준급이었다.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이번 올림픽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터뷰를 한 선수로 진종오(37ㆍKT)를 빼놓을 수 없다. 어떤 질문에도 막힘 없이 설득력 있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했다. “남들에게 보여주는 사격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사격을 하자”는 말에서는 그를 짓누른 부담의 무게가 생생히 느껴졌다. 기자가 축구 담당을 오래 해서인지 지금까지 만나 본 선수 중 최고의 인터뷰이로 차두리(36)를 꼽는데 진종오도 못지않았다.

리우=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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