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사업 실패로 힘든 시기
코치들이 장비 등 물심양면 지원
악바리 승부 근성ㆍ스피드 앞세워
전국대회 휩쓸며 최연소 태극마크
박상영의 펜싱 인생은 가난과 편견에 대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경남 진주제일중 2학년 때 처음 검을 잡은 그는 금세 두각을 드러냈다.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아 고가의 펜싱 장비를 사기 어려워 선배들로부터 장비를 물려 쓰면서도 전국 대회를 평정했다.
2012년 한국 최초로 세계청소년선수권에서 우승했고, 고 3때인 2013년 9월 인천아시안게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해 최연소 국가대표에 뽑히며 태극마크를 달았다. “상대방을 없애버리겠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나선다”고 말할 만큼 엄청난 승부욕이 박상영의 원동력이었다. 실제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훈련에 빠진 없을 정도로 그는 펜싱에 몰입했다. 그래서 별명도 ‘미친 펜서’다.
하지만 박상영은 ‘잠깐 반짝하다 말 거다’라는 말을 수 차례 들었다. 빠른 스피드는 위력적이었지만 기술이 갖춰지지 않아서였다. 박상영과 함께 대표 생활을 했던 최병철 KBS 펜싱 해설위원은 “많은 사람들이 박상영의 기량에 놀라면서도 오래 가지는 못 할 거로 예상했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그는 이런 우려를 깔끔히 잠재웠다. 최 위원은 “오늘 보니 3년 전 태릉선수촌에서 봤던 박상영이 아니다. 엄청난 스피드에 다양한 기술까지 갖췄다”고 혀를 내둘렀다.
박상영은 올림픽을 앞둔 지난해 3월 왼쪽 무릎 십자인대 파열로 수술대에 올라 1년 가까이 검을 잡지 못했다. 무릎을 굽혔다 펴는 동작을 반복하는 펜싱에서 십자인대 부상은 치명적이다. 재활 기간 동안 세계랭킹은 곤두박질쳤다. 올해 초 부상 뒤 처음 국내 무대에 나섰지만 허무하게 탈락했다. “박상영은 이제 끝났다”고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 ‘박상영이 끝났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자괴감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방법은 뼈를 깎는 재활뿐이었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 종일 재활에 매달렸다고 말했다. 박상영은 “최근까지도 재활 훈련을 거르면 바로 ‘신호’가 왔다. 하체 훈련이 지나치게 많으면 다리가 부었다”고 고백했다. 지칠 때마다 올림픽에 서는 꿈을 꾸며 힘을 냈다. 그는 “꿈에서는 올림픽 금메달을 세 번은 땄다”고 웃으며 “오직 올림픽에 출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이겨냈다”고 입술을 깨물었다. “금메달을 따고 누가 가장 먼저 떠올랐느냐”는 질문에 잠시 생각하던 박상영은 고개를 숙이며 “무릎이요”라고 했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였다. “무릎아 고마워.”
박상영의 펜싱 입문과정도 극적이다. 박상영은 부모님의 사업 실패로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비싼 장비를 구매해야 하는 종목 특성상 박상영은 남모르게 눈물을 많이 흘렸다. 박상영의 어려운 형편을 알고 발 벗고 나선 이는 그의 펜싱 입문을 도운 현희 코치였다. 체육 교사 겸 펜싱부 코치로 활동하던 현 코치는 학교의 장비 지원을 끌어내 박상영이 펜싱 선수의 꿈을 꺾지 않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박상영이 경남체육고교로 진학하자 이번엔 현 코치의 남편이자 당시 경남체고 코치였던 정순조 현 감독이 발 벗고 나섰다. 정 감독은 당시 정정순 감독(현 경남체고 교감)과 함께 박상영이 꿈을 이어갈 수 있도록 뛰어다녔다.
현 코치는 “박상영은 다른 선수들과는 남다른 목표가 있었다”라며 “국가대표가 목표가 아니라 그랜드슬램(아시안게임, 세계선수권, 올림픽 금메달)을 할 거라고 되뇌었다”라고 회고했다.
한편 박상명의 어머니, 최명선씨는 “집안 사정이 안 좋아 (박)상영이를 위해 해줄 게 기도밖에 없어 두 달 전부터 108배 기도를 올렸는데, 이렇게 금메달을 따내 감격스럽다”고 말했다. 리우=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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