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국정을 잘못해서 이른바 ‘콘크리트 지지율’이 무너졌다고 떠들 때, 으레 나오는 말이 ‘대통령의 소통 부족’이다. 소통이 부족하고 소통이 안 되는 것이 비단 대통령뿐이랴. 사람 사는 어디서나 소통 부족으로 갈등이 생기고 심지어 전쟁도 일어나는 것 아닐까. 나만 해도 그렇다. 여기저기서 노년의 삶에 관해 상담한다. 그 중 ‘어떻게 하면 소통을 잘할 수 있냐’고 물어 올 때 제일 난감하다. 나부터 도무지 어찌할지 모르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현재 지구에는 65억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근데 65억명 인구의 유전자 99.9%가 남들과 같단다. 그러니까 사람의 차이는 0.1%의 차이에서 온다. 이렇게도 비슷한 사람들이, 더구나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동포끼리 왜 이리 소통이 안 된다고 난리일까.
멀리 볼 것 없이 내 식구, 내 자식들과의 소통도 생각해 보면, 막막하기 이를 데 없다. 자식들은 늙은 부모와 소통하기 보다는 이것저것 나무라고, 타이르려 한다. 나이 들수록 늘어나는 자식들 ‘지적질’의 원인을 알아냈다. 독서회서 읽은 책으로부터다. 저자의 딸은 중학교 1학년 때, 갑자기 엄마를 비판하는데 재미가 들렸다고 한다. 사실을 잘못 알고 있다고, 음식을 소리 내며 씹는다고, 먹으면서 말을 한다고 지적하곤 했다. 이를 기점으로 모녀간 본격적인 대결이 이어졌단다. 저자는 10대 몸의 호르몬 변화가 원인이며, 그게 여러 가지 표면적 이유로 촉발돼 엄마에 대한 분노로 표출되는 거라고 설명한다. 또 이런 대목도 있다. 딸이 가임기가 되면서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갖게 되었고 그 때문에 가족이 자기를 더 존중한다는 사실을 무의식적으로 깨닫는다는 프로이트 식의 설명을 내놓은 의사도 있다는 것이다.
10대에 시작된 부모를 향한 지적질은 나이가 먹어감에 따라 부모의 자리를 차지하고 노부모를 뒷자리로 몰아세우기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 역시 끊이지 않는 자식들의 지적질에 지쳐가고 있다. 이처럼 귤껍질 까발려지듯 계속 지적을 당하다 보면 결국 주눅이 들어 평소 잘하던 일에도 괜히 실수를 연발하게 되기도 한다. 이렇게 실수투성이 부모를 바라보면서 자식들은 실망하고, 또 이제는 어찌할 수 없는 노인이라고 낙인 찍기도 한다. 이런 상황이 늙어 가는 부모와 중년이나 초로의 자식 간에 벌어지는 소통 부족의 상황이다.
이런 관계가 계속되는 와중에 쉼 없이 늙고 퇴화하다 보면, 우리 노년 쪽에서도 이제는 자신들도 어찌해 볼 수 없는 노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결국 노인들은 주위에서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조차도 ‘이젠 다 된 노인’이라고 체념해버리는 소위 ‘사회적 와해 증후군’에 빠져 버리게 된다
이처럼, 할 말도 다 못하고 언로가 막힌 상황에서 다소 엉뚱한 맥락일지는 모르겠으나 “말할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할 수 있고, 말할 수 없는 것에는 침묵해야 한다”는 내가 좋아하는 철학자의 말이 떠오른다. 말할 수는 있지만,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고 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의 처지다.
‘노인들만 할 말을 참고 침묵하느냐’고 항변하는 젊은이들의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러나 어쩌랴. 99.9%의 유전자가 같지만, 단지 0.1%의 차이 때문에 서로 할 말을 참고 사는 지혜 때문에 이 사회도, 가족 간에도 겉으로나마 질서가 유지되고, 문명사회라는 겉모양을 갖추고 사는 거 아닐까.
고작 0.1%라는 그 차이를 넘어서야만 보다 인간적인 문명사회가 되는 거 아닐까. 나와 다른 사람 모두 0.1% 정도 서로 다른 말을 못 참아 주고 못 들어 주는 인간들의 옹졸함에 전율할 뿐이다.
지난 200여년 간 인류는 물질문명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이제 앞으로의 인류사에서는 0.1%의 다름과 차이를 넘어 소통이 원활하게 이뤄지는 보다 인격화된 문명으로 진화하기를 기원한다.
고광애 노년전문 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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