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싱 막내 박상영, 에페 종목서 세계 3위 꺾고 金
막판 5연속 득점하며 4점차 뒤집어 ‘기적 드라마’
“너무 급해, 침착하게 수비부터 신경 써… 그래, 넌 할 수 있어.”
박상영(21ㆍ한국체대)의 입에서 마법 같은 주문이 흘러나왔다. 9-13으로 뒤진 채 끝난 2세트. 마지막 3세트 경기가 시작되기 전, 지긋이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하는 사이, “할 수 있어”라는 주문을 무려 6번이나 되뇌는 박상영의 입 모양이 TV중계 카메라에 잡혔다. 주문은 거짓말처럼 기적이 됐다.
세계랭킹 21위,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한국 펜싱 대표팀 막내 박상영이 짜릿한 대역전극을 펼치며 한국 선수단에 세 번째 금메달을 안겼다. 박상영은 10일(한국시간) 리우데자네이루 카리오카 아레나3에서 열린 남자 펜싱 에페 개인 결승에서 세계랭킹 3위 헝가리의 제자 임레(42)를 15-14로 제압했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김영호 이후 16년 만의 펜싱 남자 개인전 금메달이다. 올림픽에서 한국 펜싱이 금메달을 딴 것은 플뢰레의 김영호와 2012년 런던올림픽 여자 사브르 개인전의 김지연, 남자 사브르 단체전에 이어 역대 4번째다.
보고도 믿기 힘든 드라마 같은 대역전극이었다. 마지막 3세트에서 박상영은 10-14로 뒤져있었다. 임레가 1점만 뽑으면 경기가 끝나는 상황. 대표팀 감독마저 뒤집기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절망적인 순간에 박상영의 검이 춤을 췄다. 차곡차곡 점수를 쌓아 마침내 14-14가 되자 경기장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헝가리 팬을 제외한 모든 관중이 “꼬레아”를 외쳤다. 박상영이 마지막 공격까지 성공하며 승리를 확정 짓자 관중들은 “판타스틱” “판타스틱, 꼬레아”라는 말과 함께 기립박수를 쳤다.
그도 그럴 것이 에페는 플뢰레, 사브르와 달리 점수 차가 벌어지면 만회하기가 극히 힘든 종목이다. 유일하게 동시타가 인정되기 때문이다. 먼저 공격에 성공한 쪽만 점수가 올라가는 플뢰레나 사브르와 달리 에페는 서로 동시에 공격했을 경우엔 양쪽 모두 득점을 인정한다.
박상영 입장에서는 무조건 공격만 염두에 두고 있을 수 없었다. 규정 시간 안에 서둘러 점수 차를 좁히려면 공격에 집중해야 하는데, 단 1점이라도 잃으면 안 되니 수비 역시 신경을 써야 했다. 에페는 전신을 모두 공격할 수 있다 보니 막아야 하는 범위도 넓다. 그래서 이날 박상영이 10-14의 점수를 15-14로 뒤집은 것은 기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린다.
박상영은 벼랑 끝에 몰리자 과감한 승부수를 던졌다. 현장에서 경기를 본 최병철 KBS 펜싱해설위원은 “박상영이 영리한 작전을 폈다. 임레가 동시타 전략으로 나올 것에 대비해 먼저 상대의 검부터 제압했다. 이렇게 하면 동시타가 나올 확률이 크게 떨어진다”고 설명했다. 14-14를 만든 뒤에는 반대로 먼저 허를 찔러 ‘골든포인트’를 따냈다. 박상영은 경기 뒤 “임레는 원래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스타일인데 결승에서는 계속 기다리다가 역습으로 점수를 냈다. 나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한 것 같아 경기하기 굉장히 불편했다”며 “‘천천히 하자’ ‘너무 급해’ ‘할 수 있어’라는 말을 계속 되새겼다”고 밝혔다. 올림픽 전까지 전혀 금메달 후보로 거론되지 않다가 조별리그부터 승승장구해 결승까지 오른 그는 “준결승까지는 즐기자는 마음이었는데 막상 결승에서 욕심이 생겨 힘이 들어갔다. 왼쪽 가슴에 단 태극기를 생각하며 더 집중했다”고 말했다. 조종형 펜싱대표팀 총감독조차 “솔직히 막판에는 나도 포기했다”고 털어놓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박상영은 포기하지 않았고 피스트 위에서 기적을 꽃피웠다.
박상영은 아직 배가 고프다. 그는 시상식후 “사실 단체전 금메달을 따러 올림픽에 왔다”며 씩 웃었다. 첫 올림픽서 금메달 2개를 가져가겠다는 야심이다. 박상영의 황금빛 주문이 다시 시작됐다.
박상영은 14일 시작하는 에페 단체전에서 2관왕에 도전한다. 개인전에서 조기 탈락한 선배 정진선(32ㆍ화성시청), 박경두(32ㆍ해남군청)와 함께 나선다. 박상영은 “(정)진선이 형은 저와 비슷한 시기에 무릎을 다쳐 함께 재활했다. 내가 결승에 오르자 두 형들이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그 마음에서 진심이 느껴졌다”며 “사실 나는 단체전을 보고 올림픽에 왔다. 꼭 형들과 단체 금메달을 따겠다”고 다짐했다.
리우=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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