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홀연히 떠나기 전엔
지적이며 정치적 의식 지닌 역할
12년 만에 복귀한 후
‘남영동 1985’서 강 과장 맡아
악역으로 입지 넓히게 돼
‘부산행’서 분노유발자로 각인
그의 스크린 속 변절에서
386세대의 아이러니 보여
한 때 사회 개혁을 꿈꿨고, 연기를 변혁의 도구로 여겼다. 서울대 경영학과(84학번)를 졸업하기도 전에 극단 천지연에 들어갔다. 무대에서 연기 잔뼈가 굵을 무렵 카메라 앞에서 재능을 발휘하게 됐다.
충무로에 발을 디딘 지 오래되지 않아 주연급으로 뛰어올랐다. 영화 '네온 속에 노을 지다'(1995)와 ‘억수탕’(1997) 등에서 주요 역할을 맡으며 대중의 시야에 들어섰다. 운동권 성향을 감출 수 없다는 듯 이주노동자의 신산한 삶을 그린 영화 ‘바리케이드’(1997)에서 공장 노동자를 연기했다. 홍상수 감독의 장편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7)에서 삼류 작가를 연기하며 입지를 굳혔다. 배우 송강호가 그의 입김에 기대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영화와 첫 인연을 맺었을 정도로 영향력도 있었다. 명문대를 졸업하고 사회적 비판의식까지 갖춘 지성파 배우는 어느 날 베트남으로 건너가 사장님이 됐고, 스크린을 오래도록 벗어났다.
지난 7일 1,000만 클럽에 가입한 여름 흥행 대작 ‘부산행’에서 대기업 임원 용석을 연기해 관객의 공분을 자아낸 김의성의 젊은 날 이력은 제법 화려하다. 의기로 시작한 연기는 선하거나 지적이거나 정치적 의식을 지닌 여러 배역으로 확장됐고, 김의성을 스타덤에도 올려놓았다. 악역에 몰두하고 있는 지금의 김의성과는 뚜렷이 대조된다.
지적 배우의 낯선 귀환
홍상수 감독의 영화 ‘북촌방향’(2011)은 영화팬들의 눈이 번쩍 뜨일 장면을 선사한다. 영화감독 성준(유준상)은 서울 인사동을 찾았다가 오랜만에 중견 배우 중원(김의성)과 마주하게 된다. 낮술을 마시며 반가움을 표현하려는 중에 중원은 신세한탄을 늘어놓으며 성준을 공격한다. 성준이 오래 전 자신을 영화에 캐스팅해 주기로 하고선 약속을 지키지 않아 자기가 잊혀진 배우가 됐다는, 남 탓을 겸한 넋두리였다. 1999년 ‘주노명베이커리’와 ‘이프’를 마지막으로 모습을 감춘 뒤 해외로 이민 갔다는 근황을 풍문처럼 전했던 김의성이 12년 만에 대중 앞에 나서는 순간이었다. 성준은 홍 감독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데, 홍 감독이 캐스팅 약속을 어겨 김의성이 베트남으로 떠난 게 아니냐는 착각을 일으키는 장면이었다. 허구와 실재가 뒤섞인 듯한 역할을 연기하며 김의성은 그렇게 충무로로 귀환했다.
‘건축학개론’에서 건축학과 교수로 짧게 등장한 김의성은 ‘남영동 1985’(2012)로 충무로에서 다시 자리잡을 수 있는 틈새를 찾았다. 1985년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간 민주화 운동가 김종태를 고문하는 강 과장 역할은 맞춤옷과도 같았다. 촐싹대고 의뭉스럽고 야비하면서도 잔인한 강 과장은 김의성의 몸을 통해 실체를 얻었다. 운동권 성향이 강했던 배우는 독재자의 하수인으로 충무로에 뚜렷한 인상을 남기며 출연작을 이어가게 됐다.
강 과장 이후 악역들이 줄을 섰다. 주로 체제를 적극적으로 수호하려 하거나 적어도 체제 순응적인 인물들이 김의성을 통해 스크린에 구현됐다. 900만 관객을 동원한 ‘관상’(2013)에서 그는 음흉한 지략가 한명회를 연기했다. ‘오피스’ 속 꼰대 기질이 강한 영업부장도 김의성에겐 제격이었다. 그가 집안 제사를 이유로 퇴근하려는 부하직원에게 “조상님 밥그릇 챙길 시간에 니 밥그릇이나 챙겨”라고 불호령을 내릴 때 뭇 직장인들은 호랑이 상사가 눈앞에 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된다.
비열한 변절자, 그래서 더 악랄한
김의성의 연기 이력은 역설의 연속이다. 스크린 밖에서 그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배우로 평가 받고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자신이 부당하다고 여기는 사안에 대해선 육두문자까지 동원하며 목소리를 높인다. 여당의 수장이나 대기업의 총수도 그가 쏟아 붓는 독설을 벗어날 수 없다.
선행으로 대중의 눈길을 잡기도 했다. 지난 4월엔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복직을 염원하며 쌍용차를 구입한 뒤 이를 위안부 피해 할머니를 위해 기증했다. 역사와 사회 현상에 대한 김의성의 신념이 행동으로 옮겨진 경우다. 스크린 속 악역으로 관객들의 공분을 사는 반면 카메라를 벗어나면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는 셈이다. 김의성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런 활동은 그의 연기에 모순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한 제작사 대표는 “김의성은 SNS 스타이고 사회적 발언도 많이 하는데 정작 영화 속에선 악역을 맡게 되면서 이미지의 충돌이 생긴다”고 분석했다. “인간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듯해 관객들이 더 매력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젊은 시절 선한 지식인 역할을 하다 중년이 된 뒤 악역을 주로 하는 변절자의 이미지도 그의 연기를 더 크게 공명시킨다. 관객들은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며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다가 제도권 정착 뒤 기성질서를 강화하는 386세대의 변질을 김의성을 통해 목도한다.
살짝 치켜보는 듯한 김의성의 눈도 비열하고 비정한 이미지를 강화한다. 한명회가 고개를 기울인 채 권력의 무정함을 관상쟁이 내경(송강호)에게 설파할 때, 용석이 좀비 무리를 간신히 헤치고 돌아온 석우(공유) 일행을 바이러스 감염자로 몰아붙일 때 그의 눈은 기묘하게 빛을 발한다. 영화계에서는 “사악한 눈빛 연기는 김의성이 최고”라는 평판이 돈다. 정지욱 영화평론가는 “‘부산행’은 좀비가 등장해 허구성이 강한 데도 김의성의 악역 연기로 현실성을 띠게 된다”며 “남들을 꼬드겨 악행을 저지르는 모습은 결국 그의 연기력을 통해 설득력을 얻는다”고 평가했다.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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