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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중 납치

입력
2016.08.0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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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8월 8일

생환한 직후 인터뷰하는 DJ. 자료사진.
생환한 직후 인터뷰하는 DJ. 자료사진.

1973년 8월 8일 야당 정치인 김대중이 일본 도쿄 그랜드팰리스 호텔에서 괴한들에게 납치당한다. 괴한들은 마취약으로 그의 의식을 앗은 뒤 오사카(또는 고베)로 이동, 모터보트에 그를 태워 먼 바다에 대기 중이던 536톤급 ‘용금호’에 인계했다. 배에 있던 자들은 김대중의 손발을 묶고 판자 위에 눕혀 “송장 염하듯” 다시 판자와 묶었고, 두 손목에는 30~40kg 무게의 돌인지 쇳덩이인지를 달았다. 그들은 그를 수장시키려 했다. 경상도 충청도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사내 대여섯 명의 대화 중에 ‘상어’라는 말도 들렸다고 훗날 김대중은 회고했다.

‘바닷속이니 몇 분이면 모든 것이 끝날 거야.(…) 어떤가 이 정도 살았으면 된 것 아닌가.’ 그러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다. 살고 싶다. 살아야 한다. 아직 할 일이 너무 많다. 상어에게 하반신을 뜯어 먹혀도 상반신만이라도 살고 싶다.’(김대중 자서전, 상권 313쪽)

그는 두 해 전인 71년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해 민주공화당 후보였던 박정희 당시 대통령의 오금을 저리게 했고, 이듬해 10월 박정희는 “민족사의 진운을 영예롭게 개척해 나가기 위한 중대한 결심” 곧 ‘10월 유신’을 선포했다. 국회 해산과 계엄령, 그리고 헌법 개정. 그는 대통령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간선하고, 의원 1/3을 대통령이 추천하고, 연임 제한을 철폐하고, 그 헌법의 효력마저도 정지시킬 수 있는 긴급조치권을 자신에게 부여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반발하는 정치인들을 잇달아 연행해 구금하고 고문했다.

졸지에 망명객이 된 그는 나라 바깥에서 외신 인터뷰와 강연 등을 통해 ‘유신 쿠데타’의 정체를 폭로했다. 그 결실로 73년 7월 6일 미국 워싱턴에서 ‘한국민주화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가 출범했다. 그는 일본 지부도 창립하려고 했다.

그의 납치-살해 음모는, 첩보를 입수한 미 CIA와 일본 해상보안청의 개입으로 실패했고, ‘구국동맹행동대’소속이라고 신분을 밝힌 괴한들은 납치 129시간 만인 13일 밤 그를 동교동 자택 앞에 떨구고 사라졌다.

“밤은 깊었다. 대문 앞에 서서 문패를 올려다봤다. ‘김대중 이희호.’ 문패가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았다. 골목 안은 조용했다. 집안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대한민국, 한여름 밤. 나는 초인종을 눌렀다. 막 퇴근한 가장처럼.”(자서전 317쪽)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납치 129시간 만에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온 DJ와 이희호 여사.
납치 129시간 만에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온 DJ와 이희호 여사.
동교동자택에서 납치와 관련한 회견을 하는 DJ.
동교동자택에서 납치와 관련한 회견을 하는 D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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