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8월 5일
1943년 2월 18일, 독일 뮌헨대학 구내에 나치 만행을 폭로하는 전단을 살포한 혐의로 체포돼 불과 나흘 뒤 처형 당한 한스ㆍ조피 숄 남매와 크리스토퍼의 사연은 종전 후 평전 등 책과 영화를 통해 비교적 널리 소상히 전해졌다. 뮌헨 스타델하임 교도소 단두대에 가장 먼저 선 것은 조피였고, 동생의 피가 묻은 칼날 앞에 서서 한스가 “자유여 영원하라”고 외쳤다는 사실도 알려져 있다.
존엄과 자유를 향한 젊은 그들의 용기와 단두대를 압도한 의연함은, 홀로코스트의 야만과 별도로 나치의 비열함과 잔인성을 폭로하고 또 거기 동조한 전후 독일 시민들의 죄의식을 아프게 들쑤시곤 했다. 그들이 처형되기 전에도 후에도 수많은 이름없는 비유대인 저항운동가들이 교전 중에 전사하거나 게슈타포에 체포돼 고문 끝에 숨을 거뒀다. 베를린 베딩의 플뢰첸제 교도소에서만 1933~45년 사이 약 3,000여 명이 처형됐다.
숄 남매가 처형된 지 5개월여 뒤인 그 해 8월 5일, 젊은 사형수 16명이 플뢰첸제 교도소 단두대에서 오후 7시부터 3분마다 한 명씩 정확히 45분 동안 차례대로 처형됐다. 22세의 에바 마리아 부흐(Eva Maria Buch,1921~1943)도, 23세의 네덜란드계 독일인 카토 본트여스 판 베이크(Cato Bontjes van Beek)도 그 처형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 있었다.
숄 남매가 ‘백장미단’이란 이름으로 활동한 것처럼 그들은 ‘붉은 오케스트라(Red Orchestra)’라는 이름으로 나치의 잔학상을 폭로하며 시민의 저항을 촉구하는 유인물을 뿌렸다. 배포할 문건을 프랑스어로 번역했을 뿐인 에바-마리아 부흐는 동지들을 지키기 위해 글을 작성한 혐의까지 스스로 떠안았고, 판 베이크는 옥에 갇혀 더 긴 기간 동안 고문을 견디면서도 숄 남매 못지않은 의연함으로 인간에 대한 믿음과 자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 단두대에 섰다. 그녀의 시신은 가족에게도 인도되지 않고 베를린대학 해부생물학연구소의 실험 재료로 쓰였다.
백장미단과 달리 붉은 오케스트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공산주의 계열의 단체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기 전까지 서방 사회는 저항의 역사에서 그들을 철저히 배제했다. 헤르만 핑케의 2003년 책 ‘카토 폰트여스 판 베이크’(한국어판 2007년 발행, 김조년 옮김, 바이북스)가 잊힌 그녀와 그들의 이야기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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