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널이 무너졌다.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끔찍한 재난 속에서 따뜻한 긍정 에너지를 불어 넣는 이가 있다. 배우 하정우(38)는 그간 영화 속에서 쌓아온 유머러스한 이미지를 영화 ‘터널’(10일 개봉)에 고스란히 녹여 냈다. 혼자 깜깜한 터널 안에서 어둠과 추위, 외로움을 극복하며 살아남기 위해 사투를 벌이는 하정우의 연기는 압권이다. 살아야 한다는 인간의 강한 생존 의지가 그의 몸을 빌어 영화 곳곳에서 발현한다.
4일 오후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하정우는 “요즘 테러 등으로 흉흉한 소식들이 많아 재난 영화라도 희망을 드리고 싶었다”고 했다. 관객들에게 “한 사람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인간의 존엄성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덧붙였다.
영화는 시작하자마자 터널 속에 갇히는 자동차 세일즈맨 이정수(하정우)의 위기를 보여준다. 터널이 무너진 후 돌과 먼지에 뒤덮인 정수가 지그시 눈꺼풀을 들어 올릴 때 관객은 살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엄습해오는 공포에 소름이 돋게 된다.
“‘터널’은 이미 무겁고 고통스러워 보이는 설정이기 때문에 연기까지 어둡게 가는 건 보는 분들이 힘들 겁니다. 그 안에서 적응해나가는 생존기가 좋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톰 행크스 주연 영화 ‘캐스트 어웨이’를 떠올렸죠. 주인공이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잖아요.”
그의 말대로 터널 속 정수는 ‘캐스트 어웨이’의 척 놀랜드(톰 행크스)처럼 삶의 끈을 놓지 않으려 한다. 차 트렁크에서 발견한 세척제로 더러워진 차 안을 닦고, 축구복을 입고는 추위를 견딘다. 손톱깎이로 수염을 잘라내고 라디오 주파수를 맞춰 클래식도 들으며 “살아서 나갈 수 있다”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러다 터널 안에서 생존한 개 ‘탱이’를 만나 개 사료를 나눠 먹으며 친구가 된다. 마치 ‘캐스트 어웨이’의 놀랜드가 배구공 친구 윌슨으로 위안을 얻었던 것처럼.
하지만 홀로 고립된 채 인간의 온갖 감정을 표현해내야 하는 하정우의 고통은 만만치 않았다. 휴대폰으로 전화를 하고 혼잣말을 읊조리는 정수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해내느냐가 연기의 관건이었다. 하정우는 ‘하정우식’ 방법으로 난관을 돌파했다. 전화하는 장면에서 실제로 상대배우들과 통화를 하는 식이었다. 아내 세현 역의 배두나와 구조대장 대경 역할을 한 오달수에게 끊임없이 전화를 걸었다. 배두나는 “해외에 촬영하고 있을 때 (하)정우 오빠에게 전화가 오면 꼭 받았다”고 할 정도다.
한강 다리를 폭파하겠다는 테러범과 통화하며 독점 생중계(‘더 테러 라이브’) 욕심을 채우는 앵커를 연기했던 게 도움이 됐을 법도 하다. 하지만 “빛까지 직접 조절해야 해서 ‘아, 이번에는 조명까지 신경 써야 하는 구나’하는 숙제를 안고 있었다”고 털어놨다.
영화는 어두운 터널을 그리기 위해 조명을 최소화했다. 자동차 실내등과 하정우가 손에 든 플래시가 전부였다. 조명감독이 직접 하정우에게 빛의 방향과 세기 등을 지시했다. 엔딩 크레딧에 조명 담당으로 하정우의 이름이 올라가도 될 정도의 역할을 했다.
하정우의 팬들은 이번 영화에서 ‘먹방’ 연기를 펼치는 하정우를 볼 수 없다는 게 서운할 수도 있겠다. 딸에게 줄 케이크와 생수 두 병을 조금씩 아껴먹는 정수의 모습만이 그려진다. 그런데 ‘먹방’ 연기의 달인으로 여겨지는 하정우는 정작 “매운 음식은 하나도 못 먹는다”고. “청양고추나 풋고추는 매워서 못 먹어요. 떡볶이도 못 먹고요. 소양인이라 돼지고기나 보리밥으로 건강을 챙겨요. 보양음식도 잘 안 먹고요. 이상한가요? 하하.”
강은영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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