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부산 해운대에서 24명의 사상자를 낸 김모(53)씨의 광란의 질주가 자신이 앓고 있는 뇌질환과 무관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블랙박스가 공개됐다. 이에 따라 “뇌전증(간질)을 앓고 있어 사고에 대한 기억이 없다”는 운전자 김씨의 진술과는 달리 사고 당시 의식이 있었을 가능성에 대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부산 해운대경찰서는 특정범죄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상 도주치상(뺑소니) 및 교통사고 처리특례법상 치사상 혐의로 김모씨에 대해 체포영장을 발부 받았다고 4일 밝혔다. 경찰은 인근 폐쇄회로(CC)TV와 블랙박스를 확보해 확인한 결과, 7중 추돌사고 전 500~600m 지점에서 1차 추돌사고를 낸 후 아무런 조치 없이 현장을 빠져나간 것으로 확인돼 이런 혐의를 적용했다.
경찰은 또 김씨가 뇌전증을 숨기고 지난 7월 운전면허를 갱신한 것을 확인, 도로교통법 위반 혐의를 추가해 구속영장을 신청키로 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7중 추돌사고 직전 인근 도로 2차로에서 앞서가던 승용차를 들이받은 뒤 차선을 3차로로 변경해 현장을 빠져나갔다. 김씨는 신호를 위반하고 전방의 교차로를 가로지르는 시내버스 사이를 달려 아찔한 곡예운전을 했다.
이어 김씨의 차량은 해운대구 좌동 해운대문화회관 사거리 앞 횡단보도 보행자와 차량 6대를 잇따라 들이받고 3명의 사망자와 21명의 부상자를 내고서야 멈춰 섰다.
지기환 인제대 부산백병원 신경과 교수는 “뇌전증 양상이 워낙 다양해서 환자의 상태를 보지 않고 진단하기는 어렵다”면서도 “정말 우연히 복합부분발작(의식이 없는 상태)과 자동증(이유 없이 동작을 반복)이 함께 나타났더라도 다양한 자극에 반응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지 교수는 “가령 복합부분발작이 있는 주부가 자동증을 동반하면 요리를 하던 이전의 행동을 단순 반복하는 정도가 가능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결국 김씨가 1차 사고 직후 차선을 옮기며 운전했고 현장에서 추가 사고 없이 보행로를 침범하지 않은 채 차선을 지키는 등 방어운전을 한 것은 당시 의식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해운대 경찰서 관계자는 “김씨는 사고 기억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CCTV 화면을 보면 의식을 잃은 사람의 운전으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반면 김씨가 의식이 있었다고 하면 1차 사고를 내고 현장을 빠져나간 것이 이해되지 않는 다는 지적도 있다. 한낮이라 오가는 차량과 목격자가 많았고 김씨의 외제차는 사고보험에 가입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김씨가 굳이 뺑소니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김성수 해운대경찰서장은 “1차 사고시점을 전후로 뇌전증이 발현됐을 수 있는 등 다양한 상황을 두고 조사 중“이라며 “전문가 의견 등을 통해 김씨의 1,2차 사고와 뇌전증 간 연관성을 파악하는데 수사력을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정치섭 기자 sun@hankookilbo.com
● 사고 당시를 담은 동영상 (KNN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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