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조심해, 회사 오래 다녀봤자 겨우 아파트 한 채 남는 허무한 인생이라고.”
뉴욕 한복판에 위치한 잡지 편집부를 배경으로 어제와 다를 바 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는 등장인물들의 신랄한 대사가 끊임없이 오간다. 업무 비효율과 직장 상사로부터 받는 스트레스, 자신의 능력을 알아주지 않는 회사에 대한 불만이 쏟아진다. 익숙한 사무실 풍경. 겨우 선배들 숙취 음료를 사오는 게 전부인 아이비리그 출신 인턴은 말한다. “다들 불행해 보여요.”
28일까지 종로구 연지동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연극 ‘글로리아’는 미국 출신 극작가 브랜든 제이콥스가 지난해 발표한 동명의 작품을 번역한 것으로 국내 초연이다. 직장생활부터 인종, 성별, 세대, 성적 취향, 학벌 등 민감한 문제들을 에두르지 않고 솔직하게 다룬다. 따발총처럼 대사가 쏟아지지만 가벼우면서도 예리하게 동시대 논쟁적인 문제들을 담아내 지루함이 없다. 김태형이 연출을 맡았으며 한 명을 제외한 배우들이 1인 다역을 연기한다.
연극의 제목이기도 한 인물 글로리아는 언뜻 직장인의 비애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는 1막에서 거의 비중이 없다. 그저 어젯밤 열었던 집들이 파티에 동료 한 명만 왔을 정도로 철저히 소외됐으며 ‘감정적 테러리스트’ 정도로 동료들 입에 오르내리는 존재일 뿐이다.
글로리아의 ‘극단적 선택’으로 1막이 끝나고 펼쳐지는 2막은 앞선 무대와 전혀 다른 무게감을 갖는다. 글로리아의 존재가 사라지고 나서야 사람들은 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이 과정에서 인간의 저열하고 이기적인 본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딘은 자신의 자서전 제목을 ‘글로리아’로 바꿔 각색하고, 비극의 현장에 있지 않았거나 심지어 글로리아의 존재조차 몰랐던 켄드라와 낸도 그녀를 주제로 출판 계약을 한다. “타인의 경험을 착취해 글을 쓰고 있다”거나 “사무실 왕따의 삶에 주석처럼 얹혀 간다”는 비판은 그들에게 이미 들리지 않는다. 그들의 트라우마는 글로리아의 인생을 돈벌이로 활용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했을 뿐이다.
모두가 ‘팔아먹기 좋은’ 글로리아의 삶에만 집중하는 사이, 로린은 유일하게 글로리아의 평범했던 삶을 이야기하는 동료다. 그러나 뜨개질과 책 읽는 것을 좋아했던 글로리아의 삶은 ‘맛 없는 기내식’이나 ‘주변의 괜찮은 차이니스 레스토랑’보다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진짜’ 글로리아의 삶만 쏙 빠진 채 연극은 흘러간다. 현실 어딘가에 있을 법한 여러 역할을 어색함 없이 오가는 배우들과, 존재가 사라지고 나서야 관심거리가 된 글로리아는 정체성과 편견에 대해 고민하게 하고 우리 안의 괴물 같은 모습을 직시하게 한다. (02)708-5001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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