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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싱한 한치물회 한 그릇, 이 맛에 여름을 난다

입력
2016.08.03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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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제철인 활한치로 차려낸 한치 물회.
여름이 제철인 활한치로 차려낸 한치 물회.

어느 향토음식 장인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잠자리가 날기 시작하면 한치가 제일 맛있는 때다.’ 생각해보니 구름 한 점 없는 무더위와 열대야가 오기 전, 해가 기우는 저녁 동네 길에는 잠자리가 날고 있었다. 잠자리네, 하며 길을 걷다 보니 문득 해안 가까이 한치 배들이 불을 밝히기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한치 철이구나!’ 이는 제주 사는 사람들에겐 한여름에 더욱 각별한 감탄사다. 낚시를 하는 사람들은 밤이 되면 너도나도 채비를 들고 바닷가로 나갈 것이고, 해안 가까이 줄지어 떠 눈이 부시도록 밝은 빛을 연출하는 한치 배들의 광경에 바다풍경은 더욱 운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입이 한층 더 즐거워지는 시기가 왔기 때문이다.

한여름의 제주 풍경.
한여름의 제주 풍경.

제주는 연일 폭염이다. 한낮엔 구름 한 점 없어 소나기도 없고 그 많던 바람도 좀체 불지 않는다. 밤에는 말 그대로의 열대야라 잠을 쉽게 이룰 수가 없고 잠을 자더라도 피곤만 하다. 그래도 사람들의 일상은 변함이 없어, 폭염과 열대야는 이겨내야만 하는 고단함이다. 아침부터 후텁지근한 공기 속에서 일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점심은 이럴 때 각별하다. 이열치열이라지만 뚝배기안의 들들 끓는 국물이나 대접 안에 벌겋게 김이 오르는 음식들은 부담이다. 시원하고 든든한 점심 한 끼, 이 시기에 한치 물회 만큼 좋은 메뉴는 없는 것이다.

몸에서는 더운 열기가 발산되고, 입에서는 뜨거운 김이 훅훅 몰아친다. 에어컨으로 시원한 식당 안이라지만, 방금 들어온 몸은 좀체 식지 않는 것이 요즘이다. 자리에 앉기도 전에 활한치 물회 빨리 달라 주문한다. 그냥 한치가 아닌 활한치 물회가 이 시기엔 정답이다. 자리에 앉아 조금 식은 몸에 마음이 누그러질 즈음, 커다란 대접에 활한치 물회가 담겨 나오고 옆에 밥 한 공기 놓인다. 넉넉하고 차가운 육수에 각종 야채와 얼음이 담기고 그 위에는 반점이 울긋불긋 요동치는 투명한 한치회가 소복하게 얹혀있다.

손은 다시 조급함에 시달린다. 수저를 들고 대접 안의 것들을 잘 섞고 식초나 빙초산으로 맛을 맞춘 다음에 얼음을 한 켠으로 제치고 한 수저 푹 떠서 입에 넣으면, 후텁지근함과 뜨거운 햇볕에 시달렸던 오전의 고단함이 순식간에 다스려지는 것이다. 차가운 육수와 함께 제 살 아삭하게 보존한 야채들과, 그 안에 섞인 달달하고 쫄깃한 한치살은 그 만으로도 시원한 든든함이다. 한국인은 밥심으로 산다지만, 한여름 활한치 물회 앞에서는 잠시 이야기가 달라진다. 바로 옆에 놓인 밥 한공기, 물회에 넣어 먹을 수도 없어 따로 먹어야 하는 그 밥이 존재감을 가지기란 쉽지 않다.

고추장물회
고추장물회
된장물회
된장물회

제주의 물회는 보통 된장베이스의 육수로 만드는 물회이지만, 요즘엔 육지의 손맛과 관광객들의 입맛에 영향을 받아 고추장이나 고춧가루로 붉게 내는 물회도 많아졌다. 제주 물회 본연의 모습을 여기서 굳이 따지지는 않는다. 무더운 여름엔 활한치를 넉넉히 넣은 물회가 주인공이고, 고추장육수냐 된장육수냐의 문제는 각자의 입맛에 호불호가 갈리기 때문이다.

산방산과 송악산을 돌아다니며 여름바다의 강렬한 기운너머 보이는 가파도와 마라도를 구경하다가 가까운 모슬포 포구거리에 들어서면 저마다의 손맛으로 물회를 만들어내는 식당들이 늘어서 있다. 한림포구 골목마다 직접 한치배를 운영하며 물회를 내는 집들도 좋다. 개인적으로는 된장물회를 선호하는데, 도두항 안쪽의 어느 횟집에서 가장 무난한 된장물회를 만났다. 당장 보기에는 황토색의 멀건 육수이지만 자극 없는 감칠맛이 살아있는 된장육수는 톡톡 튀는 반점의 투명한 한치회의 달달함과 정말 잘 어울린다. 물회만 먹을 수 없어 작은 한치회를 한 접시 앞에 놓고 점점 어두워지는 창밖을 느끼며 시원한 소주 한잔 하는 저녁은 한여름 제주살이의 소소한 낙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제주에서의 물회는 된장물회와 고추장물회, 그리고 저마다의 손맛이 뒤섞여 객관적으로 맛있다 함을 말하기가 힘들다. 그러다 보니 저마다 선호하는 식당도 다르며, 기대했다 실망하거나 우연한 만남에서 대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폭염과 열대야가 관통 중인 지금의 제주에서, 주인공은 한치이다. 시원한 육수에 소복하게 놓인 활한치회를 잘 섞어 한 입 넣는 일은 상상만으로도 가슴과 머리가 시원해지는 것이다. 어찌하지 못할 무더위에 몸과 마음이 지치는 한낮이라면 당장 활한치 물회를 내는 식당으로 달려가보자. 위로와 기운극복의 한 그릇이 당신 앞에 금방 놓일 테니 말이다. 딱 지금이 그 시기이다.

전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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