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사 열풍이 그려낸 로맨틱한 풍경 가운데 하나는 광활한 만주벌판을 내달리는 기마군단이다. 일본 고고학자 에가미 나오미가 만든 ‘기마민족설’에 기반을 둔 이 상상은 몽골, 만주 등 동북아 북방지역 기마민족이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걸 뼈대로 삼는다. 위대한 상고사에 목마른 이들이 놓칠 리 없는 호재다. 배달민족이 동북아의 패자이고, 한국은 그 적장자이며, 일본은 우리의 동생 격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기마민족설’이 실은 미국의, 정확히는 2차 대전 뒤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최고사령부(GHQ), 소위 ‘맥아더 사령부’의 작품이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근대서지학회가 내는 반년간지 ‘근대서지’ 2016년 상반기호에 수록된 전경수의 논문 ‘십오년 군치(軍治)와 강정웅(오카 마사오)의 민족학’에서다. 서울대 교수를 거쳐 지금은 중국 구이저우대 특별초빙교수로 재직 중인 전경수는 GHQ 자료, 한중일 자료는 물론 학자들이 남긴 일기까지 들춰가며 이런 주장을 폈다.
전 교수가 주목한 것은 전후 GHQ의 정책이다. ‘천황을 위해 죽겠다’며 ‘일억옥쇄’(一億玉碎)를 외쳐댄 제국주의 일본을 정상국가로 전환시키기 위해서는 황도(皇道)주의와 신국(神國)사상을 해체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 GHQ는 산하조직으로 교육학문 분야를 전담하는 CIE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작업 방향을 모색하던 CIE는 1933년 오스트리아 빈 대학에 제출된 인류학자 오카 마사오의 박사학위 논문 ‘고(古)일본의 문화층’에 주목하게 됐다.
눈여겨볼 것은 오카 마사오는 1933년 박사논문을 1945년 종전 때까지 공식 석상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다가 갑자기 GHQ에 이를 찾아달라 부탁을 했고, GHQ는 이 요청에 따라 1947년 유럽작전사령부를 통해 빈 대학에서 이 논문을 공수해와서 직접 오카 마사오에게 건넸다는 점이다. GHQ로서는 오카 마사오의 논문이 자신들의 정책에 유용하다고 판단했다는 의미다.
GHQ가 유용하게 여겼을 측면은 두 가지다. 하나는 오카 마사오가 중일전쟁 뒤 크게 불어난 유목민족에 대한 관심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해 ‘기승(騎乘)민족론’을 내세웠다는 점이다. 이는 일본이 만주-한반도 영향을 크게 받았다는 것으로, 이 이론에 따르자면 일본 안에서 만세일계(萬世一系)를 이룬 천황의 권위는 추락한다. 실제 1940년쯤 비슷한 주장을 한 다른 학자들이 황실모독죄로 처벌받은 사례도 있다. 오카 마사오가 종전 이전에 이 논문 언급을 피했던 이유이자, 종전 뒤 천황의 인간선언을 이끌어냈던 GHQ가 반가워한 이유이기도 하다.
또 하나는 동남아에 대한 관심 차단이다. 일제는 대동아공영권 기치 아래 동남아 장악에 온 힘을 쏟았다. 태평양 세력인 GHQ로서는 이를 막을 필요가 있었다. 더구나 당시 소련과 중공에 대항해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전 교수는 “GHQ로 공수된 오카 마사오의 박사논문은 황도주의의 금기 파괴와 공산주의의 보루 축성을 위한 안성맞춤 순기능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CIE는 “전후 오카 마사오의 박사논문으로 촉발된 기마민족설 심포지엄을 지원”하기도 했다.
오카 마사오의 기승민족론은 중일전쟁 이후 불어난 북방대륙에 대한 관심에 호응해 유목민족론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한 것인데, 이 기승민족론이 에가미 나미오를 만나 ‘기마민족론’으로 다시 한 번 발전해버린 것이다. 기마민족론의 뿌리는 배달민족의 영광이 아니라 일제의 로망과 맥아더의 필요였던 셈이다. 전 교수는 ‘기마민족설’에 대한 우리식 해석에 대해 “우스꽝스러운 아전인수로 그 말의 본 뜻을 안다면 조심해서 써여 한다”고 말했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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