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한 달 만의 재회다. 그 사이 배우 손예진(34)이 품고 있는 결은 또 달라져 있다. 지난달 개봉한 영화 ‘비밀은 없다’에서 광기로 일그러진 비이성적인 모성을 담아냈던 그의 얼굴에 엄혹한 시대를 감내해야 했던 한 여인의 처연한 운명이 새로이 담겼다. 손예진의 목소리에서 축축함이 느껴지는 게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다.
영화 ‘덕혜옹주’(내달 3일 개봉)가 처음 공개된 27일 언론시사회 자리, 손예진은 상기된 낯빛으로 등장했다. 영화를 보면서 펑펑 울었다고 했다. 눈물로 얼룩진 화장을 급하게 고치느라 간담회에도 살짝 늦었다. 28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손예진은 전날의 눈물을 떠올리며 쑥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제가 출연한 영화를 보면서 운 건 처음이었어요. 자기 영화에 빠져서 우는 배우들을 그동안 이해 못했었는데, 제가 그럴 줄은 몰랐어요(웃음). 덕혜의 아역 시절부터 훅 빨려 든 것 같아요. 내 영화인데도 관객처럼 보게 되는 새로운 경험을 했죠.”
덕혜옹주의 한 많은 삶을 보면서 어떻게 냉정해질 수 있을까.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는 열세 살에 일본에 볼모로 끌려가 해방 전까지 일제의 삼엄한 감시 아래 살았다. 원치 않는 강제 결혼과 이혼, 딸의 사망, 정신병원 입원 등 숱한 파란 속에서도 늘 고국을 그리워했다. 영화는 덕혜와 독립운동가 김장한(박해일)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면서 덕혜의 숨겨진 삶을 되살린다.
돌이켜보면 손예진과 ‘덕혜옹주’는 꽤 오래된 인연이다. 권비영 작가의 원작 소설에 감명 받은 손예진은 문득 영화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다 허진호 감독의 영화 제작 소식이 들려왔다. 누가 덕혜 역을 맡게 될까 궁금했지만 그 후 진전된 소식은 전해지지 않았다. 어느 날 한 영화제에서 우연히 허 감독을 만났다. 따로 한번 시간을 내 보자고 했다. 허 감독의 의중을 읽은 손예진은 묵묵히 기다렸다. 또 다시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비밀은 없다’ 촬영 중이던 2014년 가을 마침내 ‘덕혜옹주’ 시나리오가 손예진에게 건네졌다. “출연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작품이었다.
“역사 속 실존인물이라는 부담감을 내려놓자 한 여인의 한 많은 인생이 보였어요. 가슴에 절절하게 다가왔죠.” 손예진은 기록과 사진들을 찾아보면서 덕혜의 운명을 몸 안에 녹였다. 그 즈음 일본어 대사를 지도한 스태프로부터 그의 시모가 서울대병원 수간호사로 재직하던 시절에 본 노년의 덕혜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단발머리에 작은 핀을 꽂은 채 멍한 눈으로 병원 복도를 쓸쓸히 오가던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에 시도 쓰고 동요도 지을 만큼 총명했던 덕혜가 찾아오는 사람 하나 없는 쓸쓸한 노년을 보내다니…. 끝을 아는 이야기인데도 가슴 아팠어요. 연기하면서도 덕혜의 외로움을 느낄 수 있었죠. 하지만 감정에 휩쓸려 무조건 미화를 할 수도 없었어요. 자칫 하면 역사 왜곡이 될 수 있으니까, 감독님과 함께 고민을 많이 해야 했어요.”
손예진은 ‘덕혜옹주’ 촬영을 마친 다음날 곧장 여행짐을 꾸렸다고 한다. “집에 있으면 텅 빈 마음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였다.
그의 각별한 애정은 제작 참여로도 이어졌다. 촬영 중간 소속사와 상의해 10억원을 투자했다. 시대극 재현에 따르는 어려움을 잘 알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20대엔 배우로서 책임감은 별로 느끼지 못했던 것 같아요. 내 역할을 잘해는 것만도 벅찼거든요. 경험이 쌓이고 시야가 넓어지면서 영화 현장의 구조와 시스템이 보이기 시작하더군요. 시간과 돈이 있으면 완성도를 더 높일 수 있잖아요. 더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욕심과 책임감이 생겼어요. 선뜻 투자한 건 아니고, 사실 손을 벌벌 떨었죠(웃음).”
인터뷰 도중 카페 아래층에서 인터뷰를 하던 박해일이 불쑥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옹주 마마.” 장난스럽게 꾸벅 인사도 했다. 박해일을 반갑게 맞이하며 손예진이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영화 속 덕혜에게 찾아온 찰나의 행복처럼 느껴져 왠지 위안이 됐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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