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촌은 4년 주기로 8월이면 ‘열병’을 앓는다. 전세계인들의 스포츠 축제, 올림픽이 열리기 때문이다. 2016 리우 올림픽 개막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지구촌 최고의 스타들이 한데 모여 열전 17일간의 대하 드라마를 완성하게 된다. 그들이 써 내려가는 스토리에 세계인의 시선이 쏠린다. 역대 한국선수단이 올림픽에서 완성한 ‘드라마 10선’을 돌이켜 봤다.
올림픽 은메달, 세계선수권 金으로 승화시킨 장창선

한국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는 1976년 몬트리올 대회 레슬링에서 우승한 양정모다. 하지만 세계무대에서 최초로 시상대에 애국가를 울려 퍼지게 한 이는 장창선이다. 1964년 도쿄올림픽 레슬링 자유형에서 은메달을 목에 건 장창선은 1966년 미국 톨레도에서 열린 세계 레슬링선수권대회 자유형 플라이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장창선은 결승전 직후 일본, 미국 선수와 점수가 똑같아 체중으로 메달색깔을 가리게 됐다. 몸무게가 적게 나가는 이가 금메달이다. 장창선은 무려 한 시간 이상을 사우나에서 견디며 체중을 빼야 했다. 그는 결국 일본 선수보다 100g적게 나가 시상대 맨 위에 설수 있었다. 장창선은 당시 애국가가 준비돼 있지 않아 유학생으로 경기를 지켜보던 정신과 의사 이시형 박사가 육성으로 불렀다고 전했다.
광복이후 올림픽 제1호 금메달 양정모

올해 8월 1일은 레슬링 자유형 양정모(당시 23세)가 광복 이후 처음으로 대한민국에 올림픽 금메달을 안긴지 40년 되는 날이다. 금메달이 확정된 순간은 1976년 8월1일 한국시간 일요일 오전 9시27분이다. 그는 자유형 62㎏급 결승리그에서 몽골의 오이도프, 미국의 존 데이비스를 물리치고 정상에 올랐다. 당시 TV는 정규방송을 멈추고 긴급뉴스로 그의 금메달 소식을 전했고, 신문 호외 판이 나오는 등 전국은 흥분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이후 레슬링은 한국의 대표적인 올림픽 효자 종목이 됐다. 몬트리올 올림픽부터 2012년 런던 올림픽까지 한국은 레슬링 종목에서 총 11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다.
여자배구, 구기종목 사상 첫 메달

한국 여자배구는 1976년 몬트리올에서 헝가리를 물리치고 동메달을 목에 걸며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 메달의 꿈을 이뤘다. 여자 배구가 동메달까지 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8개국이 출전한 가운데 조별 리그 B조에 속한 한국은 첫 경기에서 소련에 1-3으로 졌다. 이후 쿠바와 동독을 각각 풀세트 접전 끝에 3-2로 물리치고 조 2위로 준결승전에 올라 일본과 만났으나 0-3으로 졌다. 하지만 3위 결정전에서 헝가리에 3-1 역전승을 거뒀다.
황영조, 56년만에 손기정 바통 이어받아

1992년 8월9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경기에서 황영조는 일본의 모리시다와 함께 선두 레이스를 펼쳤다. 그는 몬주익 언덕의 마지막 오르막길에서 마침내 모리시다를 따돌리고 선두로 치고 나갔다. 모리시다의 가쁜 숨소리가 들리지 않을 때쯤 올림픽스타디움이 황영조의 시야에 들어왔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옹을 비롯한 관중의 응원을 한 몸에 받으며 황영조는 결승점에 도달했다. 2시간13분23초의 기록으로 황영조가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을 확정 짓는 순간이었다. 황영조의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제패는 한민족 56년의 한을 풀어준 쾌거였다.
‘우리는 하나’ 남북한 공동입장

올림픽에서 남북선수단 공동입장은 냉전시대의 그림자가 드리운 마지막 분단국 남북한이 전 세계에 ‘우리는 하나’라는 메시지를 던진 감동적인 광경이었다. 남북한 선수단 180명은 흰 바탕에 하늘색 한반도가 그려진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200개 참가국 중 96번째로 개막식에 모습을 나타냈다. 남북 선수단은 북한의 박정철 감독(유도)과 남한의 정은순(여자농구)을 공동 기수로 앞세우고 행진곡풍 ‘아리랑’에 맞춰 입장하면서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손을 흔들어 화답했다.
신금단 부녀상봉을 기억하십니까

신금단은 북한 육상의 전설이다. 11번의 세계신기록을 세우고 국제대회에서 28개의 금메달을 땄다. 1963년 11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가네포 대회 3관왕이었고 당시 400m와 800m 세계 최고 기록 보유자로 1964년 도쿄올림픽의 유력한 우승후보였다. 하지만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가네포 대회가 정치와 스포츠가 연관됐다는 이유로 입상자들에게 도쿄올림픽 참가를 불허했다. 북한은 이에 올림픽을 보이콧했다. 신금단을 포함한 북한 선수단은 10월 9일 도쿄에서 철수했는데 신금단의 아버지 신문준은 한국전쟁 중인 1ㆍ4후퇴 때 헤어진 딸을 만나기 위해 당국의 허가도 받지 않고 무작정 도쿄로 갔다. 철수 1시간 전 도쿄 조선회관에서 딸을 만났지만 부녀의 대화는 고작 7분. 부녀는 이후 다시 얼굴을 보지 못했고 신문준은 1983년 사망했다.
마르지 않은 ‘우생순’의 눈물

한국 여자핸드볼은 덴마크와 악연이 깊다. 1988 서울,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을 2연패한 한국은 1996 애틀랜타 대회 결승에서 연장 끝에 덴마크에 졌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4강에서도 또 덴마크에 패했다. 2004년 아테네 결승에서 다시 만난 두 팀. 19차례나 동점을 이루는 접전 끝에 2차 연장까지 갔지만 승부를 내지 못했다. 결국 승부던지기에 들어가 2-4로 한국이 아쉽게 무릎을 꿇었다. 비록 은메달에 그쳤지만 한국 올림픽 역사에 길이 남을 명승부로 큰 감동을 줬다. 투혼의 은메달은 나중에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우생순)’이라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박태환의 금빛 물살 ‘아시아의 기적’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한국인 체형을 감안할 때 수영에서 세계를 제패하는 건 요원하다고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마린보이’ 박태환(27)이 한계를 넘었다. 그는 만 열아홉의 나이에 출전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남자 자유형 400m 결선에서 3분41초86로 가장 먼저 터치 패드를 찍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한국 수영이 44년 동안 이루지 못한 금메달의 꿈. 박태환이 한국 체육사를 새롭게 장식했다. 자유형 400m 금메달은 한국 뿐 아니라 아시아 수영 사상 최초였다.
9전 전승 신화 “야구가 해냈다”

김경문(58) 감독이 이끈 야구대표팀은 2008년 8월13일 베이징 올림픽 본선리그 1차전에서 ‘종가’ 미국에 8-7로 역전승한 뒤 16일 3차전에서는 일본에 5-3 역전승을 거두며 전승 우승 신화에 시동을 걸었다. ‘아마 최강’ 쿠바마저 누르고 예선 7전승을 거둔 김경문호는 22일 준결승에서 다시 마주친 일본에 8회말 이승엽(40)의 역전 결승 2점포를 앞세워 6-2로 승리해 한국 야구사 100년 만에 첫 올림픽 결승 진출을 일궜다. 이튿날 쿠바와 결승에서는 9회말 1사 만루 역전패 위기에서 병살타를 유도해 3-2 승리를 지키며 세계 최정상에 우뚝 섰다. 한국 남자 단체 구기 종목의 첫 금메달이기도 했다.
“축구도 질쏘냐”일본 꺾고 동메달

2002년 한ㆍ일 월드컵 4강의 주역 홍명보(47ㆍ항저우 그린타운 감독)가 사령탑으로 변신해 10년 만인 2012년 런던올림픽에 출전했다. 한국의 최대 고비는 개최국 영국과 8강이었다. 한국은 페널티킥을 두 번이나 내주는 불리함을 딛고 전ㆍ후반과 연장을 1-1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승리를 거두고 4강에 올랐다. 준결승에서 브라질에 0-3으로 패한 홍명보호의 동메달 결정전 상대는 일본. 독도 문제를 놓고 한일 양국이 첨예하게 갈등하던 시기라 긴장감을 넘어 비장함까지 감돌았다. 한국은 박주영(31ㆍ서울)과 구자철(27ㆍ아우크스부르크)의 연속골로 2-0으로 승리해 한국 축구 사상 첫 동메달의 금자탑을 쌓았다.
김기중 기자 k2j@hankookilbo.com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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