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7월 28일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했다. 한 달 전 사라예보 사건, 즉 보스니아를 시찰 중이던 제국의 황태자가 세르비아의 슬라브민족주의자에게 암살당한 데 대한 응징이 명분이었다.
사건과 선전포고 사이 한 달 동안 유럽 열강의 지도자들은 저마다 외교ㆍ군사 전문가들을 지도 앞에 불러모아 국가별로 편을 가르고, 전력을 저울질하며, 전망과 득실을 따지고 따졌을 것이다. 얼결에 휩쓸려 든 국가도 있었지만 다수는, 적어도 힘센 나라들은 전쟁을 원했다. 그들은 100년 넘게 이어져 온 유럽의 ‘평화’와 그 사이에 쌓인 감정들, 묵은 판도를 흔들어 채워야 할 욕심의 리스트를 쌓아두고 있었다. 신-구 제국주의 국가간 식민지 이권을 둘러싼 크고 작은 충돌과 앙금, 그 아래 도사린 자본의 억눌린 욕망. 러시아를 맹주로 한 범슬라브주의와 독일이 선봉에 선 범게르만주의의 각축과 비등점에 이른 민족주의. 거기에 갓 독립해 두 차례의 국지적 전쟁을 치르며 패기와 전의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던 발칸반도의 작지만 앙칼스러운 맹수들.
그리고, 그 한 달 사이 덥고 습한 유럽의 여름도 지금처럼 익어갔을 것이다. 냉매가 발명되고 초기 형태의 에어컨이 등장한 것은 1920년대 이후였다. 최초의 에어컨메이커인 캐리어주식회사가 설립된 건 1915년이고, 냉매의 등장과 함께 초기 형태의 에어컨이 등장한 건 1920년대 이후였다. 황제 앞에서 정장과 군복 차림으로 지도 위에 주사위를 던지던 이들도 덥고 짜증스러웠을 것이다. 하인들의 부채질과 얼음물로는 솟구치는 불쾌지수와 아드레날린을 제어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선전포고 사흘 뒤 세르비아의 후견국 러시아가 총동원령을 선포했고, 3국동맹(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의 독일이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동시에 프랑스로 총구를 겨눴고,(독일은 유럽 서부를 먼저 제압한 뒤 러시아를 친다는 이른바 ‘슐리펜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3국협상(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주축인 프랑스와 영국이 잇달아 뛰어들었다. 양측 약 1,000만 명에 달하는 전사자를 낸 ‘거대한 전쟁 Great War’이 그렇게 시작됐다.
유럽의 지도자들 누구도 자신들이 전쟁통에 에어컨도 없이 다섯 번의 여름을 나게 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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