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한국스포츠의 지상 과제 중 하나는 북한과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었다. 한국은 19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여자배구, 복싱, 역도, 레슬링, 유도 등 39명(선수 26 임원 13)의 정예멤버를 꾸렸다. 하지만 은메달 1개에 머물러 뮌헨 대회를 통해 올림픽에 데뷔한 북한(금1 은1 동3)에 참패했다는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야 했다.
한국 선수단에 유일한 메달을 안겨 ‘체면’을 지켜준 이가 재일동포 유도 선수 오승립(70)이다. 1972년 9월. 뮌헨의 메세겔렌데 언덕에 있는 경기장에 오승립이 섰다. 남자 미들급(80kg)에 출전한 그는 3경기 연속 한 판승으로 8강에 올랐다. 8강 상대는 그 해 일본선수권 우승자 세키네 시노부. 오승립은 경기 내내 상대를 몰아쳐 심판 전원 우세승을 거두고 여세를 몰아 결승까지 진출했다. 금메달을 놓고 다시 세키네와 격돌했다. 지금은 패자부활전을 거치면 최대 동메달 밖에 딸 수 없지만 당시는 결승까지 오를 수 있었다. 당시 한국 언론은 결승 소식을 이렇게 전했다.
‘吳(오) 선수는 宿敵(숙적)인 日本(일본)의 세끼네를 맞아 10분의 경기 시간 중 잘 싸웠으나 게임종료 약 30초를 남겨놓고 失點(실점) 당해 아깝게도 거의 손에 쥐었던 金(금)메달을 놓치고 말았다.’
오승립이 유리한 경기를 펼쳤다는 걸 알 수 있다. 외신들도 ‘경기종료 30초 전까지 오승립이 완전히 게임을 리드했다. 심판 2명의 판정이 1-1로 엇갈렸는데 주심이 세끼네 편을 들어 1-2로 오승립이 졌다’고 보도했다.
오승립이 일본 선수에 무릎을 꿇자 국내에서는 재일동포인 그가 “일부러 진 것 아니냐”는 뒷말을 낳기도 했다. 하지만 오승립은 “지고 싶어서 지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발끈했다. 은퇴 후 오승립은 경기대 유도 강사로 잠시 일했지만 지금은 일본 오사카에 살고 있다.
사실 한국 유도가 올림픽 효자 종목으로 자리잡는데 재일동포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한국 유도 첫 메달의 주인공도 1964년 도쿄올림픽 80kg급에 출전한 스물 셋의 재일동포 김의태(75)였다. 김의태가 감독으로 유도대표팀을 이끌고 참가한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에서도 재일동포 박영철(62)이 80kg급에서 동메달을 땄다. 리우에서도 재일동포 3세 안창림(22ㆍ수원시청)이 남자 73kg급에서 금메달 사냥에 나선다. 그는 이 체급에서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의 이원희(35ㆍ현 여자대표팀 코치) 이후 끊어진 금맥을 잇겠다는 각오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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