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에 관한 한 전남 담양은 축복받은 곳이다. 산으로 계곡으로 시간 내서 떠나지 않아도 넉넉한 그늘과 풍경에 젖어 들 수 있어서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지만, 숲이야 말로 자연의 시간에 충실한 결과물이다. 담양을 대표하는 관방제림과 메타세쿼이아길, 죽녹원은 각기 다른 시공간의 매력을 지니고 있다.
▦주민들의 사랑방, 관방제림
‘뭘 찍으려고 저렇게 어슬렁거리나?’평상에 옹기종기 모여 쉬던 어르신들 눈길에 살짝 경계의 빛이 감돈다. 아름드리 나무 그늘 아래서 한가롭게 쉬고 있는 모습이 평화로워 들었던 카메라를 내려 놓았다. 할아버지들 평상엔 ‘포켓몬고’인기를 능가하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48장의 ‘국민오락’판이 펼쳐져 있었다. 방해한 것 같아 괜히 미안하다. 옆 평상에는 매미소리와 뒤섞인 할머니들의 두런거림이 정겹다. 누구나 언제든 편히 쉬어가는 곳, 관방제림(官防堤林)은 영락없이 사랑방이고 마을회관이다.
읍내를 동에서 서로 관통하는 관방천(담양천)에 제방을 쌓은 건 1648년. 담양 부사 성이성이 수해를 막기 위해 축조했다. 그 제방 따라 심은 나무들이 나고 지기를 거듭해 지금은 200~300년 수령의 도심 숲이 되었다. 마을 지킴이로는 느티나무가 보통이지만 1.6km 제방에 늘어선 177그루의 보호수 중 111그루가 푸조나무다. 푸조나무는 병충해가 거의 없고, 바람에 대한 저항력도 강해 방풍림으로 제격이다. 추위를 견디는 힘이 약해 중부지방에선 자라지 못하고 남부 해안가에 많이 심는다. 그 다음으로 느티나무와 팽나무가 많고, 벚나무 음나무 개서어나무 등이 몇 그루씩 섞여 있다. 한여름 그늘 못지않게 봄이면 연초록 빛깔이 곱고, 가을에는 화려하진 않지만 단풍이 은은하다.
주민들이 주로 휴식하는 곳은 관방제림이 시작되는 부분이고, 제방 따라 사색과 산책을 즐기는 것은 관광객들의 몫이다. 느릿느릿 걸으며 담소를 나누기도 제격이고, 벤치도 많아 책을 읽거나 멍하니 앉아 쉬기에도 적당하다. 시원한 음료 한잔이 생각나면 중간지점 오른편의 ‘담빛 예술창고’에 들러 봄직하다. 미곡창고로 쓰던 건물을 통째로 카페와 전시실로 꾸민 공간이다. 주민들로부터 기증받은 책이 카페 중앙을 장식하고, 한 켠에는 대나무로 만든 파이프 오르간도 자리잡고 있다. 창고였던 만큼 천장이 높고, 한 면을 통유리로 터서 바깥풍경이 카페 안으로 시원하게 들어온다.
▦가지런한 단순미, 메타세쿼이아길
한국의 대표적 가로수 길로 사랑 받는 ‘메타세쿼이아길’은 관방제림이 끝나는 지점에서 연결된다. 메타세콰이아, 메타세쿼이어 등 외래어 표기에 혼선이 있었지만, 메타세쿼이아(metasequoia)로 통일하고 ‘가로수길’도 줄여서 ‘길’만 붙였다. (표준국어대사전도 메타세쿼이아로 표기한다.)
가슴 높이 지름이 85Cm, 높이 27m에 이르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는 덩치에 비해 역사가 짧다. 1972년 담양-순창간 국도 42호선을 건설하면서 심었으니 겨우 40년이 조금 넘었다. 2000년 국도를 4차선으로 확장하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군민들의 보존운동으로 살아남았다. 이후 2.1km 구간에 아스팔트를 걷어내고 흙길을 다져 487그루의 아름드리 메타세쿼이아길이 탄생했다. 길은 곧고 수형도 가지런해 단조롭지만 단순미와 조형미가 돋보이는 게 오히려 장점이다. 그래서 일렬로 늘어선 가로수를 배경으로 멋진 구도로 사진을 찍는 것 외에 특별히 할 일이 없다. 오로지 그늘 짙은 가로수 터널을 느리게 오갈 뿐이다. 한발두발 걷다 보면 얘기도 추억도 지나온 발길만큼 아스라히 쌓인다.
메타세쿼이아길 입구에는 프랑스 풍으로 꾸민 마을인 ‘메타 프로방스’가 자리잡고 있다. 식당과 노천카페 갖가지 기념품 상점이 색깔도 모양도 아기자기하게 자리잡고 있다. 건물과 골목장식도 소품처럼 앙증맞아 예쁜 사진을 찍기에도 제격이다.
순창으로 연결되는 4차선 국도는 아직도 공사 중이다. 기존 도로는 걷기길 보다 더 긴 구간에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가 남아 있어 천천히 드라이브를 즐기는 것도 운치 있다.
▦ 서늘한 음이온 샤워, 죽녹원
죽녹원(竹綠苑)은 이름대로 대나무의 푸른 기운이 물씬 풍겨나는 대숲 정원이다.
언뜻 모두 똑같아 보이지만 죽녹원에는 다양한 대나무가 자라고 있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분을 바른 듯 표피가 희끗희끗한 분죽(粉竹)이다. 분죽은 조직이 단단해 죽공예품을 만드는 좋은 재료이고, 담양 사람들은 아삭아삭한 식감이 좋아 죽순 중에서도 최고로 친다. 보통은 굵고 연하고 새순이 가장 먼저 돋는 맹종죽을 죽순 재료로 많이 사용한다. 이 외에도 대나무 중 가장 굵다는 왕대를 비롯해 마디가 살짝 볼록한 포대죽, 검은 빛깔의 오죽도 볼 수 있다.
대나무 자체가 찬 성질을 지니고 있어 피서지로 그만이지만, 담양군은 ‘죽림욕’을 녹죽원의 가장 큰 자랑으로 내세운다. 혈액을 맑게 하고 살균력이 높은 음이온이 특히 많이 나오는데, 대나무와 물방울이 만나면 일반 숲보다 10배가 많은 음이온이 방출된단다. 요즘처럼 장맛비가 오락가락 하는 시기에 찾으면 더욱 효과가 좋겠다.
2.4km에 이르는 8개의 산책로를 천천히 걸으면 2시간은 족히 걸린다. 사방이 온통 빼곡한 대숲이어서 길을 잃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지만, ‘죽마고우길’, ‘운수대통길’ 이정표만 찾으면 다시 정문으로 나올 수 있다.
죽녹원 대숲은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그늘이 짙다. 한 그루씩 뜯어보면 짙은 초록이지만 전체적으로는 검푸르게 보인다. 청량감이 들게 사진을 찍고 싶다면 매끈한 대나무 사이로 스며드는 역광을 고려해야 한다. 카메라 설정을‘자동’에 맞추기보다는 노출을 2~3스텝 높여 찍는 게 좋다. 휴대전화로 찍을 땐 가장 어두운 부분에 노출을 고정시켜야 대나무의 초록 빛깔이 살아난다.
▦국수, 대통밥, 떡갈비로 마무리
담양의 3개의 숲은 서로 연결돼 있어 한번에 모두 둘러볼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장점이다. 오로지 걸어서만 보려면 향교교 남단 관방제림 주차장에 차를 대고 이동하는 것이 편리하다. 관방제림을 따라 1.6km를 걸으면 메타세쿼이아길이고, 메타세쿼이아길에서 죽림원까지는 다시 관방제림을 되짚어 오면 된다. 걷기가 부담스러우면 자전거를 이용해 관방제림 입구인 향교교까지 올 수 있다. 메타세쿼이아길 쪽에서 대여해 향교교 아래서 반납하면 된다. 1인용, 2인용, 4인 가족형 대여료는 5,000~15,000원이다. 죽녹원은 향교교 다리를 건너면 바로 왼편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향교교를 기준으로 관방제림 하류 제방은 죽공예품과 청죽(靑竹)이 거래되던 죽물시장 터였는데, 지금은 20여 곳의 식당이 국수거리를 형성하고 있다. 느티나무 사이사이에 설치한 평상에 상을 차려 운치를 더한다. 식당마다 사용하는 면과 육수, 고명이 조금씩 달라 집집마다 독특한 맛을 자랑한다. 가격은 4,000~6,500원 수준. 식당마다 저마다의 비법으로 쪄낸 약계란(3개 1,000원)도 꼭 맛봐야 할 포인트. 노른자도 퍽퍽하지 않고 촉촉하다. 죽녹원 일대에는 담양의 대표음식인 대통밥과 떡갈비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여럿 있다. 향교교 부근 ‘옥빈관’은 대통밥 정식에 떡갈비도 함께 내놓는다.
담양=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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