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7월 27일
프레더릭 밴팅(Frederick Banting 1891~1941)은 1919년 캐나다 온타리오에 정형외과 병원을 개업한 지 1년도 안돼 문을 닫고 웨스턴온타리오대 생리학연구실 연구원이 됐다. 토론토대 의대를 나오자마자 1차대전이 터져 격전지 프랑스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하면서 진료에 지쳤을 수도 있고, 절친이었던 의대 동기의 당뇨병 투병이 계기였을 수도 있다. 그는 당뇨병 연구에 몰두했다.
당뇨병은 탄수화물에서 분해된 당을 에너지로 쓰거나 저장하지 못해 혈당이 높아지고 급기야 소변으로 빠져 나가버리는 대표적인 대사질환. 혈당을 조절하는 기능이 췌장(이자)의 역할이라는 건 19세기말 밝혀졌고, 췌장의 랑게르한스섬에 이상이 생기면 당뇨병이 발병한다는 건 1910년대 알려졌다. 랑게르한스섬이 분비하는 미지의 호르몬에 ‘인슐린’이란 이름을 붙인 건 영국의 생리의학자 에드워드 샤피-셰이퍼였고, 최초로 인슐린 추출에 성공한 이는 1916년 루마니아 학자 니콜라스 파울레스쿠(1869~1931)라고 한다. 하지만 파울레스쿠의 연구는 전쟁으로 결실을 보지 못했다. 밴팅이 연구에 뛰어들 무렵의 사정이 그러했다.
췌장 호르몬 추출이 어려운 이유는 함께 분비되는 단백질 분해효소 ‘트립신’ 때문이었다. 밴팅은 췌장관을 차단해 트립신 분비를 막음으로써, 실험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 두 달여 만에 인슐린 추출과 동물(개) 실험에 성공했다. 92번째 당뇨병 개가 인슐린 주사를 맞고 얼마 뒤 제 발로 서서 꼬리를 흔든 날이 1921년 7월 27일이었다.
그의 연구 결과는 그 해 12월 미국 생물학회에서 발표됐고, 이듬해 임상 실험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그는 23년, 32세의 나이로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최연소 수상자가 됐다. 그는 조교가 공동수상자가 못 되자 상금 절반을 그와 나눴고, 인슐린 특허권을 대학에 사실상 기증했다. 2차 대전에도 참전한 그는 친구이자 대학 동료인 윌버 프랭크스가 제작한 G슈트 시험 전투기에 탑승했다가 엔진 결함 사고로 숨졌다.
인슐린은 그의 친구를 비롯한 수많은 당뇨병 환자의 목숨을 구했지만, 당뇨병 자체의 치료제는 아니다. 1989년 캐나다 온타리오주 런던 시 ‘밴팅 광장’에 ‘희망의 횃불(Flame of hope)’이 지펴졌다. 치료제가 나올 길을 밝히는 그 상징의 불꽃은, 약이 나오는 날 환하게 스러질 예정이라고 한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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