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예수께서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요한복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잡아 왔을 때, 예수가 한 말이다. 최근 크게 문제가 되었던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이 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필자는 이 구절이 떠올랐다. 나향욱 선생은 무어라 말씀하셨던가. “민중은 개-돼지다”라고 설파하셨다. 그렇다. 우리는 몰랐다. 우리가 개, 돼지인 것을. 나 선생을 비난하는 모든 이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다.
“너희 중에 개, 돼지가 아닌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호메로스의 고전 ‘오디세이아’에 보면 20년 동안 떠돌며 오로지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애썼던 오디세우스가 사악한 키르케 여신의 섬에 도착하는 대목이 있다.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키르케 여신의 간계에 속아 개, 돼지가 되고 만다. 짐승으로 변한 자들은 사람에게 꼬리를 친다.
‘마치 주인이 허기를 달래주는 맛있는 음식을 늘 가져다주기 때문에 주인이 잔치에서 돌아오면 개들이 주위에서 아양을 떨 때와 같이….’(천병희)
그저 힘 있는 자와 돈 좀 있는 자들이 던져주는 음식 부스러기를 얻기 위해 우리는 아양을 떨지 않았던가. 갑-을-병-정으로 이어지는 계급사회 속에서, 정에서 병, 병에서 을, 다시 을에서 갑으로 올라가기 위해 온갖 수단을 쓰지 않았던가. 알량한 월급이 나오는 이 시절이 유지되기만 한다면 다 좋다고 여기지 않았던가. ‘좋은 게 좋은 것’이기에 학연과 지연과 혈연을 동원해서 지금 추진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어떻게든 성사되기만을 바라지 않았던가. 비록 그 일이 우리 후손들이 쓸 자연을 망치는 일이어도,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짓밟는 일이어도, 돈 없고 빽없는 사회의 대다수를 착취하는 일이어도 나만 잘 먹고 잘 살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주인집 처마 밑에서 비바람을 피하는 걸 최고의 행복으로 여기지 않았던가.
우리나라에서는 좋은 대학을 나와 지도층 인사가 되면 사기, 기망, 혹세무민을 밥 먹듯이 한다. 그들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 한들, 여신에게 대들었던 오디세우스처럼 우리는 한 번이라도 우리의 권리를 찾기 위해 아니 우리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목청껏 외쳐 본 적이 있던가. 영국의 철학자 J.S 밀이 말했다.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고. 왜? 돼지는 배만 부르면 더 이상의 것을 원하지 않는다. 주인이 자기를 때려도, 더러운 우리에 가두어도, 새끼를 데려가 팔아먹어도 그 우리를 부수고 나와 자유로워지거나 주인을 들이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철망을 부수려 했던 적이 있던가. 먹이 사슬을 끊으려 했었나. 저들이 먹다 남은 음식을 먹이통에 쏟아부으면 서로 먼저 가서 배를 채우려 하지는 않았던가. 보라. 같은 종족인 개와 돼지를 지켜주기보다는 그들과 연대하기보다는 그리하여 경계를 부수고 뛰쳐나가 자유를 얻기보다는, 주인도 아닌 주제에 주인 입장에서 주인을 위해 일하면서 동족을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야 마는 어리석은 짐승이지 않았는가.
소크라테스는 가난했지만 사람들을 만나면 늘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가장 위대하고 훌륭한 국가인 아테네 시민이면서 돈을 모으는 데는 그렇게 애쓰면서 왜 현명해지는 일과 진실해지는 것에는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가.” 돈을 모으는 것보다는 현명해지는 일과 진실해지는 것에 더 신경 쓰는 것- 이게 인간의 할 일이다.
개는 중성화수술과 성대 제거 수술로 본능도 삭제된 채 주인만 바라보고 산다. 돼지는 인간에게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평생을 단 1m도 움직이지 못하며 살아간다. 이런 동물과는 다르다고 우리는 착각하고 있었으나 선지자 나향욱 선생께서 등허리를 내리치는 죽비로 깨우쳐 주신 것이다.
“너희들은 개, 돼지야!”
명로진 인디라이터 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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