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썩은 내 가슴을/ 조금 파보았다/ 흙이 조금 남아 있었다/ 그 흙에/ 꽃씨를 심었다// 어느날/ 꽃씨를 심은 내 가슴이 너무 궁금해서/ 조금 파보려고 하다가/ 봄비가 와서/ 그만두었다” (정호승 ‘봄비’ 전문-창비시선 322 ‘밥값’ 중)
1975년 신경림 시집 ‘농무’를 시작으로 40년 간 국내 시인들의 시집을 펴내온 창비시선이 400번을 맞아 기념시선집 ‘우리는 다시 만나고 있다’를 출간했다. 박성우, 신용목 두 시인이 창비시선 301번부터 399번까지 각 시집에서 한쪽을 넘지 않는 비교적 짧은 시 한 편씩을 선정해 총 86편을 책 하나로 엮었다.
고은, 신경림, 김용택, 도종환, 나희덕, 김사인, 장석남, 정호승 등 이제는 원로급으로 불리는 시인들과 강성은, 이제니, 김중일, 이혜미, 주하림, 박소란, 안희연 등 새로운 문법을 만들어가는 젊은 시인들의 작품이 고루 담겼다. 시편마다 시인의 말을 짝 지워 시인의 육성을 좀더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편집했다. 정호승 시인의 ‘봄비’에는 “세상에는 가도 되는 길이 있고 안 가도 되는 길이 있지만 꼭 가야 하는 길이 있다”는 시인의 말이 따라 붙었다. 짧은 시들을 고른 것에 대해 신용목 시인은 “단시(短詩)라 불러도 좋고 한 뼘 시나 손바닥 시로 불러도 좋을 것”이라며 “독자들이 가능한 한 여유롭게 시와 마주 앉기를 바라는 마음”이라고 설명했다.
기념시선집 발간을 기해 김사인 시인이 진행하는 ‘시시(詩詩)한 다방’ 팟캐스트 공개방송과 시 낭독회 등 다양한 이벤트가 열린다. 이번 창비시선의 시작을 연 시인이자 시선집의 표제를 제공한 신경림 시인이 그 첫 주자다. 창비는 “첫 시집 출간 이래 창비시선의 시집들은 사람과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거두지 않는 자세를 견지해왔다”며 “한동안 위축됐던 문학시장이 조금씩 활기를 띠고 있는 지금, 시와 독자가 다시 만나는 지점을 고민하는 책이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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