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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드렁큰타이거의 등장

입력
2016.07.26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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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힙합이 국내에 상륙한 지 20여 년 만에 주류 음악으로 전성기를 맞고 있다. 그러나 대중화 과정에서 쌓아온 노력과 실력에 비해 저평가되는 MC(래퍼)들도 생겨나고 있다. 자이언티, 지코를 사랑하지만 주석, 피타입을 모르는 새내기 힙합팬을 위해 준비했다. 여기, 새로운 라임(운율)과 플로우(흐름)를 개발하며 힙합의 발전을 끌어간 MC들을 소개한다.

2007년 공연 중인 드렁큰 타이거. 한국일보 자료사진
2007년 공연 중인 드렁큰 타이거. 한국일보 자료사진

한국에 정통 힙합을 들여온 이는 누굴까. 국내 힙합의 태생을 언더그라운드 MC (독립적 자본으로 음악활동을 하는 래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메이저 음악 시장에도 힙합의 맛을 알리려는 움직임은 꾸준히 있었다. 1992년 현진영 '흐린 기억 속의 그대', 같은 해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등이 이전까지 활용되지 않은 신시사이저 멜로디와 비트를 도입해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는 평을 받았다.

그러나 팬들 중 이들의 음악을 정통 힙합의 시작으로 보는 이는 거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이들의 음악은 힙합을 표방했지만 되레 ‘랩이 섞인’ 대중가요의 성격이 짙었다. 이후 듀스, DJ DOC가 이전보다 랩에 힘을 실은 곡으로 힙합의 맛을 살렸다고는 하나, 이들 역시 본연의 라임과 플로우를 온전히 소화했다고 보기 어렵다. 대중이 콘텐츠의 결핍으로 힙합에 '오해 아닌 오해'를 쌓아가고 있을 무렵, 힙합 듀오 드렁큰 타이거가 데뷔했다.

1. "이것이 힙합" 메이저 음악시장 최초의 MC

"음악 같지 않은 음악을 이젠 모두 다 집어치워 버려야 해. 우리가 너희들 모두의 귀를 확실하게 바꿔줄게. 기다려. "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中)

1999년 드렁큰 타이거의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를 들은 대중은 충격에 빠졌다. 그동안 랩은 댄스 가요의 양념이었지, 주재료가 아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밀도 있게 채워진 랩 가사는 국내 음악계에선 좀처럼 볼 수 없는 형식이었다. 팬들은 열광했고, 그들의 구호에 맞춰 이른바 ‘부처핸접’(put your hands up을 우리말로 그대로 쓴 유행어)을 연발했다. 소위 ‘힙합교주’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시작부터 남달랐다. 드렁큰 타이거의 주축이 된 타이거JK (본명 서정권)는 초등학교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 고등학교 때까지 본토 힙합을 듣고 자랐다. 1992년 힙합가수 아이스 큐브가 한인에 대한 불만을 담은 곡 'Black Korea'를 발표하자 그는 교내 수업시간에 이를 반박하는 랩을 선보여 상을 받았다.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타이거JK는 동양인 중 유일하게 힙합 페스티벌에 초청됐고 그곳에서 한인 비하에 반박하는 'Call Me Tiger'를 불렀다. 즉흥 랩 부문에 수상한 것을 계기로 그는 국내에도 이름을 알렸다.

3년 뒤 타이거JK는 DJ 샤인 등의 도움으로 한국에서 솔로 음반을 발매했으나 서태지와 아이들의 인기에 묻혀 큰 빛을 보지 못했다. 1998년 미국에서 DJ 샤인과 함께 드렁큰 타이거를 결성한 그는 다음해 정규 1집 '난 널 원해'로 국내에 본격 데뷔한다.

2000년 발매한 2집 '위대한 탄생'까지 연달아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드렁큰 타이거는 곡 작업과 교류를 함께 할 크루(인맥과 친목으로 결성된 MC 집단)를 결성했다. 크루 '무브먼트(Movement)’에는 2집 앨범을 함께 한 윤미래, CB 매스(다이나믹 듀오 전신), 김진표 등이 소속됐다. 이후 TBNY, 에픽하이, 리쌍 등이 합류하며 '무브먼트'는 2000년대 중반 한국 힙합계를 이끄는 최대 규모의 크루로 성장했다.

2001년 'Good Life', 2003년 '남자기 때문에' 등 당시 힙합가수로는 드물게 히트작을 쏟아낸 드렁큰 타이거는 5집 이후 DJ 샤인이 팀을 탈퇴하면서 전환점을 맞았다. 솔로 체제로 전향한 타이거JK는 지금까지 홀로 드렁큰 타이거를 끌어오고 있다. 드렁큰 타이거의 첫 솔로 앨범이 된 6집 '소외된 모두, 왼발을 한 보 앞으로'는 발매한지 5일 만에 각종 온라인 음악 차트 1위를 기록했다.

2. '완치 불가능' 척수염도 이긴 뚝심

음악 활동은 비교적 순탄했지만 개인사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2000년 타이거JK는 그룹 업타운 멤버의 증언으로 필로폰 흡입 의혹에 휘말렸다. 그는 혐의를 부인했고, 실제로 소변 검사에서 음성 판정이 나왔으나 구속됐다. 이후 업타운 멤버의 증언이 거짓으로 밝혀지며 그는 36일 만에 무죄로 풀려났다.

2006년엔 건강에 문제가 생겼다. 희귀병인 척수염에 걸려 투병 생활을 시작했다. 척수염은 척수의 염증이 몸의 신경을 망가뜨리는 질병으로 열, 두통, 저림, 신경 마비 등을 초래할 수 있다. 당시 그는 치료를 위해 복용했던 약의 부작용으로 체중이 30kg 이상 불어 팬들을 놀라게 했다. 이후 꾸준한 운동요법으로 후유증을 딛고 일어나 2007년 7집 앨범을 발매했다. 척수염을 이겨낸 그의 기적적인 사례는 의학계에 보고되기도 했다.

3. 처음으로 이룬 '힙합의 대중화'

1집 제작 당시 가장 큰 벽은 다름 아닌 한국어였다. 평소 한국어로 의사소통을 하는 것은 문제가 없었지만 한국어 작사는 또 다른 문제였다. 영어 랩에 익숙한 드렁큰 타이거 대신 가수 김진표가 한국 가사의 대필을 맡았다. 웅장한 비트 위에 라임을 얹고 상당 부분을 영어 가사로 채우니 이국적인 본토 힙합의 느낌이 살아났다. 3집까지 부족한 한국어 실력으로 영어 가사를 많이 활용했지만, 4집부터는 타이거JK가 본격적으로 한글 작사를 시작했다.

3집의 타이틀곡 'Good life'는 최초로 힙합의 대중화를 이룬 곡으로 평가 받는다. "채워줄게 가득히 원샷"과 같은 중독성 있는 후렴구로 한국인의 정서를 살려 힙합에 관심 없던 대중의 호응까지 끌어냈다. 드렁큰 타이거는 이 앨범으로 Mnet 2001 뮤직비디오 페스티발 힙합 최우수 작품상, 서울가요대상 힙합부문 특별상 등을 수상했다.

2009년 발매한 8집에서 미국 MC 라킴(Rakim) 등 유명 해외 아티스트와 협업하고 아내인 가수 윤미래와 미국 진출을 시도하는 등 글로벌 차원의 프로젝트도 이어갔다. 5년의 공백기를 가진 후 발매한 2013년 '살자'에서는 기존의 화려한 기법에서 벗어나 어쿠스틱한 연주와 위로를 전해주는 가사로 한층 부드러운 음악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정규 1집 '난 널 원해'

●정규 1집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정규 3집 'Good Life'

●정규 4집 '남자기 때문에'

●정규 7집 '8:45 Heaven'

●정규 8집 'Monster'

이소라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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