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여름 극장가엔 늘 배우 이정재(44)가 있다. 2012년엔 영화 ‘도둑들’의 약삭빠른 기회주의자 뽀빠이가 관객의 마음을 훔쳤고, 지난해엔 ‘암살’의 친일파 염석진이 국민적 공분을 샀다. 그리고 제작비 100억원대 블록버스터 ‘인천상륙작전’이 27일 극장가에 상륙한다.
900만 관객이 호응한 ‘관상’(2013)까지 출연했는데도 이정재는 상업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흥행배우’라는 수식어도 그에겐 왠지 낯설다. 딱 1년 만에 천인공노할 매국노에서 구국의 영웅이 되었지만 그의 변신이 자연스러운 건, 어떤 목적성에 얽매이지 않는 그의 자유로운 모습 때문이 아닐까.
“흥행이요? 작품을 많이 해서 그렇게 된 거죠(웃음). 아무래도 배우는 흥행성보다는 작품성을 좇기 마련이에요. 작품이 의미 있는 프로젝트냐가 선택의 첫 번째 기준이죠.” 이정재가 ‘인천상륙작전’의 출연을 망설이다 결국 마음을 굳힌 이유도 같다. “처음엔 애국심에만 호소하는 영화로만 비춰질까 우려했어요… 하지만 이 영화를 놓치면 아쉬울 것 같았어요. 잘 만들면 꽤 신선한 첩보영화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역사에서 잊힌 희생자를 발굴한, 의미 있는 시도였다는 평가를 받는다면 바랄 게 없어요.”
영화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국제연합(UN)군의 인천상륙을 위해 대북첩보전을 펼친 해군첩보부대의 활약상을 긴박하게 그렸다. 이정재가 연기한 첩보부대 대위 장학수는 실존인물인 임병래 중위를 모티브 삼았다. 임 중위는 적진에서 대원들을 탈출시킨 뒤 군사기밀을 지키기 위해 자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정재는 시대상을 충실히 재현하기 위해 역사 왜곡을 경계하는 한편으로 다양한 아이디어를 제작진에 제시했다. 장학수가 UN군 최고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리암 니슨)을 만나는 장면이 그 중 하나다. “장학수와 맥아더가 한 번도 안 만나는 게 전개상 어색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언제 또 리암 니슨과 연기를 해보겠나 싶기도 했고… (웃음).”
니슨도 이정재만큼 적극적으로 의견을 보탰다. 가발과 파이프담배, 모자 같은 소품을 직접 챙겨오고, 맥아더의 고뇌를 담은 대사도 직접 써왔다. “맥아더가 무척 중요한 역할이긴 하지만 촬영분량도 많지 않은데 저렇게까지 열심히 하다니, 사실 좀 놀랐습니다. 최근에 편집본을 니슨 측에 보내면서 미국판엔 맥아더 분량이 추가될 거라고 알렸더니 ‘지금 이대로가 좋다’는 내용의 답을 보냈다더군요.”
이정재는 절친한 동료 배우 정우성과 회사 아티스트컴퍼니를 최근 설립해 신인배우 발굴과 콘텐츠 제작에 뛰어들었다. 충무로의 관심사인 두 사람의 재회 프로젝트도 현실화될 가능성이 높다. 서로 배려하는 게 몸에 배 회사 운영에도 충돌이 없다는 두 사람은 아직도 존댓말을 한다. “영원히 말을 못 놓게 됐어요. 정우성 ‘대표님’이시잖아요(웃음).” 둘이서 조조영화를 즐겨 보곤 하는데 “좌석이 편해서” 연인들을 위해 마련된 ‘스위트박스’를 선호한다고 했다.
이정재는 “이젠 나를 꾸밀 필요가 없다”고 했다. “지금까지 20여년간 영화와 인터뷰로 속마음까지 다 내보였기 때문에 무언가 더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없다”고 말했다. “어느덧 배우로 살아온 삶이 인생의 절반을 넘었어요. 이젠 개인의 삶과 배우의 삶을 구분 지을 수 없게 됐죠. 이젠 배우 이정재만 생각하면 될 거 같아요. 영화를 끊임없이 할 수 있는 기회도 있고, 요즘엔 삶이 편하고 즐거워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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