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힘센 나라의 대통령이 어린아이 앞에서 허리를 숙인다. 창문을 넘어 들어온 투명한 햇빛이 그들의 몸을 감싼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대통령의 육체는 싱싱하고, 기꺼이 머리를 내미는 유머 감각은 소탈하다. 우리는 그의 다정함이 부러워서 견딜 수 없다. 왜 우리에게는 그렇게 ‘자연스러운’ 대통령의 사진이 없는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다. 무엇이 문제인가. 한국의 관료체제가 지닌 경직된 구조인가. 혹은 정치 지도자의 굳은 마음인가. 혹은 둘 다인가. 개인뿐 아니라 언론사들까지 모여들어 자신들의 취재 경험을 꺼내놓으며 열심히 토론하는 모습에는 씁쓸한 구석이 있다.?
과연 정치가의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사진은 딱딱하고 경직된 사진보다 더 나은 것일까? 우리는 반드시 그런 대통령의 사진을 가져야만 하는 걸까? 나는 오바마의 소탈하고 부드러운 사진보다는 잔뜩 굳어 있는 대통령의 사진이 윤리적으로 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최소한 그런 사진들은 자신이 생산된 방식과 목적을 여과 없이 드러내며, 널리 확산되지도 않는다.
다정한 사진, 그리고 사진의 윤리성
하지만 오바마의 사진은 다양한 의미를 싣고 사람들을 날아가서 그들의 머리 속을 파고든다.정치가 오바마는 분명히 이런 격의 없는 사진이 지닌 위력을 잘 이해하고 있다. 대통령은 기꺼이 자신의 참모들과 몸을 부딪치며 농구를 하고, 청소부와 주먹을 맞대고 인사한다. 그리고 그런 장면을 사진으로 만들어 디지털 네트워크에 쏘아 보낸다. 이 사진들은 강렬한 정치적 메시지다. 대통령은 우리와 같은 평범하고 소탈한 생활인 중 하나다. 약자를 존중하고 평등을 믿는다. 아직 자신의 피부색을 잊지 않았다. 그러므로 국민들은 대통령을 신뢰하고 지지해야 한다. 나는 오바마의 사진을 볼 때마다 얄궂게도 한 젊은 정치 지도자가 찍어대는 사진을 떠올린다. 그의 사진들은 어색하고 기괴하다.
예를 들어 이 사진에 등장하는 열여덟 명의 인물 중에서 카메라를 바라보고 웃는 데 성공한 이는 검은 옷 위에 흰 가운을 걸친 둥근 얼굴의 정치 지도자뿐이다. 분홍색 바지를 입은 아이들은 마구 울거나 발버둥친다. 어린것들을 힘겹게 붙잡고 있는 어른들의 표정은 잔뜩 굳었다. 오바마의 사진이 일상의 자연스러운 스냅처럼 느껴진다면, 이 사진은 마치 부조리한 연극의 한 장면을 동결시켜둔 것 같다.
이 두 장의 사진은 시각적으로는 정반대지만, 기본적으로 동일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도 사진의 목적과 메시지가 같다. 그리고 생산과 유통의 주체가 지닌 성격이 유사하다. 즉 이 사진들은 정치가의 인간적인 매력을 대중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국가에 의해 촬영되어 배포된다. 차라리 김정은의 사진이 욕망하는 것은 오바마를 찍은 사진처럼 되는 것이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김정은 역시 자연스럽고 친근한 사진을 찍어서 자신의 인민들에게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단지 오바마는 성공했고, 그는 실패했을 뿐이다.
오바마 사진, 그리고 오래된 히틀러 사진
이것은 사진의 중요한 문제를 건드린다. 물론 김정은은 오바마가 될 수 없다. 그는 3대 세습을 통해 집권한, 가난한 나라의 젊은 독재자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김정은의 사진 역시 오바마의 사진이 될 수 없는가? 최소한 역사는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예를 들어 탁월한 사진가이자 이미지 조작가였던 하인리히 호프만이 찍은 ‘아무도 모르는 히틀러’에 나오는 사진들은 김정은의 사진보다는 오바마의 사진에 훨씬 더 가깝다. 사진 속의 히틀러는 다정하게 웃으며 꽃을 든 아이들의 뺨을 어루만지고, 노동자들과 술집에서 눈을 마주보며 토론한다. 사진 속의 그는 도저히 대량학살과 인종청소를 저지른 이로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사진이 찍힌 이의 내면을 투명하게 누설한다는 우리의 믿음은 근거가 있는 것일까? 게다가 우리가 보는 오바마의 사진들은 백악관의 홍보 시스템이라는 여과 필터를 통과한 것들이다. 민간인이 연루될 것이 뻔한 시리아 폭격을 지시하거나, 광범위한 개인 정보를 수집하는 프리즘 프로젝트를 옹호하는 오바마의 일그러진 얼굴을 찍은 사진 같은 것은 우리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과연 사진의 자연스러움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매끄러운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는가? 카메라를 들고 찬찬히 일상을 찍어 본 이라면, 그런 모습을 포착하는 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어색하게 굳어져 있거나, 입을 벌린 채 불안한 눈을 여기저기로 굴려댄다. 주변의 사물과 공간, 그리고 빛과 그림자는 부자연스럽다. 영화의 스틸 컷 같은 오바마의 사진과 비슷한 ‘자연스러운’ 이미지를 우리가 일상에서 포착해내기 위해서는 아마 수천 수만 장의 사진을 찍은 후에 골라내야 할 것이다.
실제로 백악관의 사진가인 피트 수자는 마치 ‘투명인간처럼’ 오바마의 주변을 맴돌며 끊임없이 사진을 찍는다고 했다. 당연히 이것이 백악관이 여느 권력 기관에 비해 덜 경직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것 역시 국가가 사진을 생산하는 하나의 전통적인 방식에 불과하다. 악어가 악어새를 해치지 않듯이, 권력은 사진가가 자신의 주변을 자유롭게 맴돌도록 허락한다.
카스트로 혁명의 무기 ‘자연스러운 사진’
홍보와 선전에 능한 국가일수록 사진 속의 인물들은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 ‘자연스러운’ 사진은 우리가 실제로 그들의 일상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한 믿음을 생산한다. 그런 사진의 강력한 힘을 눈치채고 사진가를 자신의 주변에 풀어두었던 최초의 정치가는 피델 카스트로였다. 패션 사진가였던 알베르토 코르다가 찍은 쿠바 혁명 당시의 젊은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 카밀로 시엔푸에고스는 마치 패션쇼 뒤편의 셀러브리티들처럼 화사하다. 사진 속의 그들은 시가를 물고 열띤 토론을 하고, 웃고 떠들며 바다낚시를 하거나, 군복을 입고 시민들과 함께 어울려 사탕수수를 벤다. 그리고 이 사진들은 혁명 정부의 강력한 무기로 작용했다. 카스트로는 ‘사진이 없었더라면 혁명도 없었을 것’이라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하지만 여든 살이 넘어 건강을 잃은 카스트로는 모든 전속 사진가들을 해고했다. 그는 누구도 병든 자신의 사진을 찍어서 유통시키지 못하도록 강력히 금지했다. 쿠바 사진가들의 ‘자유’는 어디까지나 권력의 통제 아래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백악관 사진가의 ‘자유’ 역시 그러할 것이다. 백악관 수석 사진가 피트 수자는 자신이 하는 일을 ‘역사의 기록’이라 부른다. 하지만 권력에 의해 생산되는 정치 홍보물은 역사의 기록이라기보다 역사가 극복해야 할 상대에 가깝다.?
어쩌면 오바마의 사진은 우리가 살고 있는 대의민주주의 체제의 어떤 맹점을 누설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정말로 백악관에서 일반에 공개하는 대통령의 사진이 정교한 규범과 이미지 생산 시스템을 통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순진한가? 아마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따뜻하고 소탈한 정치 지도자의 사진을 보고, 그것을 갖고 싶어한다. 사진에 대해 마음을 열고 환호하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과연 속고 속이는 것은 어느 쪽인가.
이미 홍보 시스템과 정치 사진은 우리가 살고 있는 대의민주주의 체제를 작동시키는 중요한 장치다. 홍보 산업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에드워드 버네이스는 1928년에 쓴 자신의 저서 ‘프로파간다’에서 단호하게 말한다. ‘이론적으로’ 모든 시민은 공공의 사안과 개별 행동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그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직접 연구하고 검토해야 한다면, 과연 결론을 낼 수 있는가? 우리는 슈퍼마켓에서 수많은 상품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하지만 그것의 성분표와 용량을 모두 검토하고 읽고 비교한다면 일상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친숙한 사진에서 얻는 대의민주제의 위로
그러므로 대의민주주의가 필요하다. 우리는 선거를 통해 복잡하고 어려운 정치적 판단을 특정한 정치가에게 위탁한다. 그러나 자신을 대신할 정치가를 선택할 때 성분표와 용량을 읽듯이 정책과 발언을 검토하는가? 따뜻한 사진을 들여다보며, 단지 그가 우리 중 하나라고, 그저 소탈한 생활인이라고 믿어버리고 싶은 것은 아닌가? 속고 싶어하는 마음과 정치 홍보 사진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다. 포장마차에서 길거리 음식을 먹거나, 아이들을 껴안고 화사한 웃음을 짓는 정치가의 사진은 ‘주권자’의 요청에 의해 생산되어 공급된다.?
그렇다면 사진 이미지를 보고 정치가에게 표를 던지고, 그에게 정치적인 판단을 위탁해버리고도 우리는 자신을 과연 주권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자크 랑시에르는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대의제에 의해 은폐된 과두정치에 불과하다고 썼다. 대의민주주의 체제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정치적 권리란 고작 몇 명의 정치 엘리트 중 한둘에게 표를 던질 자유뿐이다. 잘 정제되고 요리된 홍보 사진을 보고 정치가를 믿어버리는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초라한 정치적 자유마저도 감당하지 못하고 도피하는 것이 아닌가?
섣불리 대답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백악관 수준의 사진가와 홍보팀이 다른 대부분의 나라에도 꾸려지는 때가 올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 날이 온다면 우리의 대의민주주의는 ‘아름답고 진솔한’ 사진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장착한 권력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지금 사진이 작동하는 방식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그때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이미지의 폭격을 견뎌내야 할 것이다.
김현호(사진비평가)
공동기획:한국일보ㆍ인문학협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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