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미술관
강상중 지음ㆍ노수경 옮김
사계절 발행ㆍ240쪽ㆍ1만5,000원
“그즈음의 제 상태를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우울’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우울은 종잡을 수 없이 막연한 기분, 연기처럼 움직이는 감정 같은 것이었습니다. (중략)사실 저는 그런 감정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고 있었기에 미술 작품을 즐길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신간 ‘구원의 미술관’의 저자 강상중은 재일 한국인으로 살아야 하는 무게감을 이기지 못해 도망치듯 향했던 독일에서 알브레히트 뒤러의 ‘자화상’(1500)을 마주했던 순간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500년 전 삶을 살았던 청년 뒤러의 모습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부심과 결연한 의지가 있었고, 이 모습은 강상중에게 ‘나는 여기에 있어.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라고 묻는 듯 했다. 그 물음 앞에서 저자는 “그때까지의 미망에서 빠져 나와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하며 주변인으로 지녔던 불안을 비로소 걷어내고 어렴풋한 희망을 발견한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온 강상중은 재일 한국인 최초로 도쿄대학 정교수로 임명돼 현재 동대학 명예교수와 구마모토 현립극장 관장을 맡고 있다.
책은 미술의 위대함을 가르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색의 배합이나 붓의 터치, 예술사조 등 미술 감상법에서 흔히 사용되는 용어로 괴리감을 주지도 않는다. ‘미술 에세이’라는 장르에 걸맞게 일본 NHK 장수프로그램 ‘일요미술관’을 진행하며 접했던 미술작품을 자신의 경험과 버무려 잔잔한 언어로 표현할 뿐이다. 표현은 잔잔하지만 내용은 단단하다. 집필 당시 3ㆍ11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폭발 사고를 겪은 그는 남은 것이라곤 쓰레기와 죽음뿐인 도시 속에서 더욱더 단단해진 사유를 책에 고스란히 담아낸다.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을 걸으며 강상중은 ‘안전 신화의 시대’가 끝났음을 확신한다. “‘죽음의 잔해’ 한가운데를 걸으며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느꼈기에 그는 오히려 “‘기도’할 수밖에 없음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때 그가 떠올린 한 장의 그림. 그것은 주변인적 존재로 남아있었을 뻔한 강상중을 구원한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 ‘기도하는 손’이었다.
대량 복제되는 판화 특성상 발터 벤야민이 주창한 ‘아우라’가 상대적으로 덜한 것은 물론 심지어 마주잡은 두 손이 빼어나게 아름답지도 않은 뒤러의 그림에서 그는 예술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 적어도 살아갈 힘을 완전히 잃지 않도록 해주고 싶다”는 예술가의 바람은 고통과 고난 속에서 가장 비효율적일 수 있는 ‘기도’라는 행위에 생명력을 부여한다. 그래서 강상중은 감히 안전 신화 시대의 종언을 고하면서도 끝을 담담히 인정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얻는다.
“살아갈 힘을 잃어버린 사람은 더 이상 그 무엇에도 감동하지 않습니다. 뒤집어 말하면, 무언가를 보고 감동할 수 있다면 그건 살아갈 힘이 되살아났다는 뜻입니다.” 그림 속 청년 뒤러와 기도하는 손이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거나 알랑거릴 리 없다. 그러나 눈 앞의 작품은 묻는다. “나는 여기에 있어.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 불현듯 찾아오는 내적 일렁임. 책은 미술 작품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남긴 것을 좇는다. 그렇게 미술은 우리에게 구원이 된다.
신은별 기자 ebsh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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