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임 어 루저 베이비, 소 와이 돈트 유 킬 미”(I’m a loser baby, so why don’t you kill me). 21일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내 올림픽홀. 미국 유명 싱어송라이터 벡(46)이 자신의 히트곡 ‘루저’를 부르다 후렴구에서 마이크를 객석으로 돌리자 관객 3,000여명은 ‘떼창’으로 화답했다.
1990년대 영·미권 음악을 즐겼던 이들에게 국적을 초월해 청춘 송가로 통했던 ‘루저’(1993)의 인기는 유효했다. 벡의 자유로움엔 세월의 이끼가 끼지 않았다. 스물 셋의 나이에 심드렁하게 “난 패배자야”라고 중얼거려 청춘을 열광시켰던 벡은 쉰을 앞둔 나이에도 무대를 자유롭게 휘저으며 청춘처럼 노래했다. 그가 무대에서 “우리가 자라온 이야기”라 말한 후 들려준 삶에 대한 자조와 반항은 중년 관객들에겐 풋내 나던 시절의 추억을 소환했고, 오늘 청춘을 사는 젊은 관객들에겐 공감을 선사해 세대를 아울렀다. “유 가이즈 대박(당신들 정말 대박이에요)!” 벡이 서툰 한국말로 관객들의 호응에 감사를 표하자 객석에선 다시 환호가 터졌다.
벡은 첫 내한 공연에서 시작부터 달렸다. ‘데블스 헤어컷’부터 ‘루저’ 그리고 ‘뉴 폴루션’ 등 히트곡을 공연 초반에 연달아 선보여 공연의 열기를 달궈서다. 1994년 공식 데뷔를 해 22년 만에 처음 찾은 한국의 관객들을 위한 배려가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벡의 내한공연은 음악적 다양함의 힘을 느낄 수 있는 무대였다. 혁신과 변화를 거듭해 음악계의 돌연변이로 불리는 이가 바로 벡이다. 랩부터 전자음악 그리고 컨트리와 포크 음악을 버무려 콜라주 같은 음악을 만들어 온 벡은 그의 음악적 자산을 공연에서 아낌 없이 풀어놨다. 전자음악 비트와 밴드의 강렬한 기타 연주에 랩을 하며 열광의 축제처럼 공연 분위기를 띄우다가도 ‘블랙버드’ ‘블루문’ 같은 잔잔한 포크 음악으로 서정을 노래해 공연에 다양함을 줬다. ‘멜로우 골드’(1994)와 ‘오들레이’(1996), ‘구에로’(2005) 등 춤 추기 좋은 앨범과 ‘시 체인지’(2002)와 ‘모닝 페이즈’(2014) 등 감상용 포크 앨범을 번갈아 내며 음악적 다양함을 놓치지 않아 온 성과다. 벡은 영화 ‘이터널 선샤인’의 OST로 국내 음악팬들에게도 친숙한 ‘에브리바디스 가타 런 섬타임즈’를 불러 관객에 낭만을 선사하기도 했다. 2015년에 9집 ‘모닝 페이즈’로 미국 그래미상의 주요상인 ‘올해의 앨범상’을 받으며 건재를 알린 벡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90분이었다.
벡 특유의 익살도 여전했다. 그는 허리에 손을 얹어 엉덩이를 좌우로 흔드는 ‘막춤’을 비롯해 서툰 디스코 춤을 자신감 넘치게 추며 곡의 흥을 이끌었다. 영국의 유명 록페스티벌인 글래스톤베리의 메인 무대 등에서만 볼 수 있었던 ‘흥부자’ 벡이 한국에 강림하는 순간이었다. 벡은 자신의 트레이드 마크인 페도라를 쓰고 무대에 올라 ‘패셔니스타’로서의 존재감도 보여줬다. 벡은 “오늘 밤 여기서 밤을 새고 싶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는다”면서도 “오늘 삼겹살을 먹을 거다” 등의 농담을 하며 관객들과 허물 없이 소통하기도 했다. 앙코르곡 ‘웨어 이츠 앳’까지 총 19곡을 선보인 벡의 무대는 흥겨움과 새로움을 동시에 보여줬다. 척수손상치료를 받고 6년 여 동안 공백기를 가졌던 벡도 첫 한국 공연에 만족한 눈치다. 벡 내한공연 관계자는 “벡이 공연이 끝난 뒤 한국 관객의 기대 이상의 호응에 허리가 좀 아팠는데 그 통증도 잊고 신나게 놀았다고 말했다”고 귀띔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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