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찾은 거제, 이번엔 산에 오르기로 했다. 제주 다음으로 큰 섬인 거제의 정점에서 섬을 찬찬히 둘러보고 싶어서다. 거제에 도착한 건 점심 먹을 즈음. 식사를 마치고 나니 햇볕이 심상치 않다. 햇살은 보는 것만으로 따가웠고 기온은 이미 30도를 훌쩍 넘었다. 애먼 등산스틱만 만지작거리며 고민이 깊어졌다. 그렇다고 마냥 그늘에서 노닥거릴 수만도 없는 일. 냉수 한잔 들이키곤 산 밑까지 데려다 줄 택시를 불렀다.
오르려 했던 산은 거제에서 제일 높은 가라산(585m)이었다. 기사분께 가라산 오르기에 제일 좋은 코스로 안내를 부탁했더니 극구 말리신다. 이런 땡볕에선 생고생하기 십상이란 것. 그는 가라산 보다 낮지만 더 좋은 전망의 산을 권했다. 거제의 최남단에 있는 망산이다. 더위에 주저하던 터였기에 냉큼 그리하겠다 했다.
그는 망산까지 가는 길, 경치가 좋다며 비포장길인데도 불구하고 여차-홍포 해안비경길로 방향을 잡았고 길가의 전망대마다 차를 세우곤 바다 풍경을 사진에 담을 수 있게 배려해줬다.
고맙고 친절한 기사와 헤어진 후 본격 산행을 시작할 때다. 등산로는 홍포 버스정류장의 슈퍼마켓 옆으로 이어진다. 슈퍼에 들러 아주머니께 산행길과 버스시간을 물었더니 다시 이리 내려오지 말고 산 너머 명사로 넘어가라신다. 그쪽에도 이것저것 볼 게 많단다. 자세한 설명이 고마워 “다시 내려와야 물 한 병이라도 팔아드릴 텐데요” 했더니 그냥 씩 웃으시며 “손님이나 좋은 구경 하고 가세요” 하신다.
산행길은 시작부터 숲길이다. 뜨거운 햇빛을 피해 짙은 초록의 터널 길로 오를 수 있었다. 후박나무 동백나무가 우거진 숲은 인적이 없었고, 오로지 맑은 새소리만 가득했다. 사람이 많이 다닌 것 같진 않지만 산길이 또렷해 길을 잃을 걱정은 없었다. 경사는 급하지 않아도 계속된 오르막이라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택시기사의 말을 들은 게 정말 다행이다 싶었다. 이 더위에 이 체력으로 가라산을 올랐다면 어땠을까.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허벅지가 제법 묵직해질 무렵 드디어 정상이다.
해발 397m에 불과하지만 그 조망권은 1,000m 이상의 고봉급이다. 정상의 암반은 제법 넓었고 360도 조망에 하나도 막힘이 없었다. 주변 풍경의 3분의 2 이상은 바다다. 그 여름빛을 튕겨내는 바다 위엔 예쁜 섬들이 가득했다. 황홀한 파노라마다. 산행을 시작한 홍포의 무지개 해변이 부드럽게 활처럼 휘어선 바다를 마주한다. 남서쪽으로 소병대도 대병대도의 섬자락들이 선명하고, 조금 고개를 돌리면 가왕도 너머로 옅은 해무를 두른 매물도 소매물도 등의 섬들이 몽환적인 분위기를 내뿜는다.
홍포 해안의 오른쪽으론 비죽 나온 곶 너머 장사도 다덕도 비진도 연화도가 또 점점이 이어진다. 바다는 그 섬들이 채워져 허한 느낌이 없었지만 답답해 보이지도 않았다. 적당한 간격과 크기로 흩뿌려진 섬들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풍경이다.
망산으로 치내려온 거제의 산세도 함께 조망이 가능하다. 저 멀리 북쪽으론 처음 오르려 했던 가라산이 웅장한 자태로 서있고 거기서 흘러내린 산줄기가 저구를 지나 여차를 거쳐 둥글게 휘어져선 지금 서있는 망산에 이른다.
정상의 망산 표지석 뒷면엔 ‘천하일경’이란 글귀가 새겨져 있다. 한려수도의 아름다움이 한 눈에 펼쳐지니 그 글귀는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 천하일경에 취해 정상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극심한 조선경기 불황으로 거제의 분위기가 크게 위축됐다고 하는데, 힘들어하는 거제인들에게 이 풍경이 위로가 될 듯하다. 이 절경이 그들이 다시 일어설 힘을 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홍포 슈퍼 주인의 안내에 따라 명사 쪽으로 하산했다. 이 길 또한 숲길로 이어졌지만 중간 중간 하늘이 열리며 시야가 트였다. 간혹 암봉들이 초록의 산자락에서 툭툭 불거져 나와 악센트를 주고, 발 아래엔 명사 해수욕장의 눈부신 백사장이 아늑하게 펼쳐졌다.
산길의 끝 지점은 명사의 버스정류장. 인근의 슈퍼에 들러 시원한 음료 하나를 청했다. 한여름의 산행을 마친, 흠뻑 땀에 젖은 후줄근한 행색이 볼 만했나 보다. 평상에서 낮술을 즐기시던 슈퍼의 바깥주인께서 수도꼭지를 가리키며 세수라도 하고 가라신다. 고맙게 얼굴을 씻고 나오니 차 올 시간 남았으니 한잔 같이 하자며 붙잡는다. “이것도 인연”이라며 건네는 술은 산삼주였다. 처가에서 보내온 건데 이날 기분이 좋아 열었단다. 달랑 음료수 하나 샀을 뿐인데 너무 과한 대접이라 거듭 사양했지만 어르신은 권유를 멈추지 않으신다. “나중에 이곳 거제 명사가 참 예쁜 곳이구나 기억만 해주면 됩니다.” 그 술 한잔, 말 한마디에 산행의 수고로움이 싹 사라졌다. 그 어떤 바람도 이보다 상쾌할 순 없을 것이다.
거제의 산행길에서 만난 택시기사와 두 분의 슈퍼 주인들에게서 받은 황송한 손님 대접으로 황홀했던 하루다. 이 맑은 공기 속 그림 같은 풍경을 이고 살아 간직할 수 있는 고운 마음들일 게다.
거제=이성원기자 sungw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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